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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엄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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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봉사자 작품] 할아버지의 시계 - 김나연 외 2명
  • 등록일
    2016.10.18 14:59:14
  • 작성자
    홍보부
  • 조회수
    535
  • 내용
    할아버지의 시계
     

    김 나 연 외 2명
     

      안녕하세요. 나는 올해 81살인 송병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내 삶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얘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또 누구에게 드러내놓고 자랑할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얘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하나 순간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소박한 나의 삶 속에서도 자라나는 세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 하나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못했던 내 일생을 옛날이야기 하듯이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이제부터 아이들에게 들려준 나의 일생을 글로 풀고자 합니다.

      나는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 부모님이 사시던 곳은 강서구 발산동인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그곳에 물이 다 찼답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여기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으로 이사해서 내가 그곳에서 태어난 것이지요. 내 또래 사람들이 누구나 그랬듯이 나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8·15해방 당시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느끼는 독립의 기쁨을 절절히 느낄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나 6학년이 되었을 때 겪은 6·25 전쟁은 정말 힘들고 무서웠습니다. 더구나 우리 집은 내가 5살 때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우리 삼남매를 키우느라 경제적으로도 몹시 힘들었기 때문에 그 고통이 훨씬 심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때는 좀 더 잘 살든지 못 살든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3년 동안 전쟁을 치러내느라 다 같이 힘들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마치 영화나 게임 속의 놀이처럼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전쟁은 머릿 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지요.

      1953년 휴전으로 전쟁의 고통은 갔지만, 아버지 없이 삼 남매를 키우시는 어머니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보다 2살 더 많으셨던 어머니는 천식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오셔서 31살에 홀로 되신 우리 어머니. 지금 같으면 재혼하시라고 말씀드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당시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되시고 천식까지 앓으시며 세 자식 뒷바라지하시느라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몹시 아프고 슬픕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할머니께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많이 채워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리 할머니.
    할머니께서 나를 이끌어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지만, 삼촌 막냇삼촌께서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연이은 자식의 죽음에 할머니의 상심은 말할 수 없이 크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하려고 우리 삼 남매를 엄격하게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할머니가 책을 좋아하셨던 것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 우리 할머니는 참 많은 책을 읽으셨습니다. 책을 좋아하시는 할머니 덕분에 우리 삼 남매도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책을 읽는 습관은 내가 학교 졸업장은 없어도 많은 공부를 독학할 수 있게 만든 바탕이 되었지요.
    우리 할머니는 엄하기로도 유명한 분이신데 “일찍 들어오너라.” 말씀하셨는데 10시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작대기를 들고 나를 찾으러 온 동네를 돌아다니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엄한 할머니 밑에서 자라다 보니 우리는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들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인사 잘하고 예절 잘 지키고 동네에서 모범 청년 하면 저 송병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할머니 덕분이었습니다.
    비록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안 계셨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의 엄하고도 따뜻한 보살핌 덕에 우리 삼 남매는 반듯하게 잘 자랐습니다. 하지만 어려웠던 시절 넉넉하지 않은 살림 때문에 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누님과 동생이 있지만, 장남인 저는 가정을 돌봐야 했습니다. 집에 있는 소를 돌보기도 하고 밭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스스로 공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 제사 축문은 삼촌이 쓰셨는데 언제까지 삼촌에게 부탁할 수 없어 나 스스로 옥편을 펴다 놓고 획수를 찾아가며 독학으로 한문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주경야독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지방의회 전문교육과정과 경기대 범죄예방학과도 수료했습니다. 지금도 19명의 초등 동창들을 만납니다. 우리 동창들은 하나의 잡음도 없이 지금까지도 잘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의 도움으로 중·고등·대학교까지 졸업한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그 친구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동안 구의원 2번, 농협 이사 12년, 경로당 회장단도 7년째 맡고 있습니다. 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어릴 적 나의 성향이나 성격이 어떤지 파악할 순 없었지만 나 자신의 힘으로 한문, 영어 등의 과목을 독학한 것을 보면 뭐든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아내와 23살에 결혼했습니다. 군대 마지막 휴가 중 동네 어르신들의 이끌림에 얼떨결에 선을 보게 되었고 바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엔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른들이 정해 준 대로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 역시 아내와의 맞선 때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런 아내와 결혼 후 1남 4녀를 낳았습니다. 인제 와서 그동안 함께 살아온 세월을 생각해보니 남들처럼 내가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하고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지금도 나를 많이 챙겨주고 위합니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나를 보며 아내가 말합니다.
    “내가 당신 두고 먼저 죽으려다가도 당신이 음식 때문에 며느리한테 구박받을까 봐 그렇게 못하겠어... .”
    누군가는 먼저 갈 텐데 그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 그 빈자리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부부는 서로의 좋은 점만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베푸는 것, 그리고 참아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의 가훈은 ‘절대 남이 싫어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입니다. 1남 4녀의 자녀들에게도 항상 얘기해줍니다.
    또 남한테 손가락질받지 않는 것을 신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자녀들 모두 나의 바람대로 잘 자라주었습니다.

      20대에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끌어나가기 위해 농사를 짓느라 급급했습니다. 30대 40대가 되면서 점차 가정이 안정되자 지역을 위해서도 뭔가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나에게도 기회가 생겼습니다.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구의원도 2번이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정치인 중에 가장 존경하는 분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내가 자라던 시절엔 전 국민이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시절에 새마을 운동이 생겼고 그 운동으로 생활 수준이 조금씩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산업화를 이루면서 나라도 점차 부유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정치인들이 군사독재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때 그 시절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우리나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입법부나 사법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 잇속 챙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헐뜯고 비방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소원인 통일도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치인들이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권에서 먼저 솔선수범으로 대통합이 되어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참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6·25사변이 일어났을 때 에티오피아 등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왔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또래의 노년을 보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건강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나도 역시 건강에 관심을 두고,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산도 오르고, 배드민턴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40여 년 동안이나 이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따로 챙겨 먹는 약이 없어도 건강한 편입니다. 그래도 건강검진은 꾸준히 받습니다. 다만 위내시경 등 특수 검사는 받지 않고 일반검사만 받습니다. 특수검사를 받다가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그것으로 인해 마음의 병이 생겨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 수도 있고 나로 인해 온 가족이 불안해할까 봐 아예 그런 검진을 받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가족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운동하고 식사 잘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늙고 싶은 바람입니다.
    노후 준비를 말할 때 금전적인 부분을 위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경제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노후 준비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가장 집중하는 일은 경로당 회장 일입니다. 경로당 회장은 7년째 맡고 있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경로당 회원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드니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좁아집니다. 지금까지 주례도 30~40차례 해봤습니다. 서예학원을 오래 다녀서 주례를 한 경우엔 자필로 좋은 글귀를 적어 신랑 신부에게 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길을 되돌아보니 스스로 자랑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 ‘나도 어렸을 때 공부를 좀 더 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지금보다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 ‘아니,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학연, 지연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60년에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했습니다. 지역 사람 중 누군가 후보로 나가야 하는데 그때 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때는 선거비용을 격려금으로 받아 사용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지역을 위해 열심히 일해 왔는데 이제야 평가를 받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친목계 사람과 겨루게 되었고 제가 당선되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학벌도 좋지 않은 내가 그런 자리에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대견함 때문입니다. 물론 주위 분들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한때는 학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니 나 스스로가 꿈을 갖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구의원을 할 때 내 이름과 이력이 적힌 플래카드를 보고 부끄러운 생각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하며 공부했고 무엇이든 열심히 해왔기에 부끄러운 생각은 차츰 사라졌습니다. 한때는 내 학벌이 내 인생에 장애요소가 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이상의 학력을 소지했더라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를 생각했을 때 오히려 노력하지 않아서 더 못한 삶을 살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벌보다는 인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인성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하는데 요즘은 인성 교육보다는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너무 받들 듯이 키우다 보니 인성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공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인성교육입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인성이 못되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요즘처럼 공부하기 좋은 환경은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게 진정한 효도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옛날 모습을 학교에서 받은 교육으로 대충 알겠지만 깊숙한 이야기들은 잘 몰랐을 것 같습니다. 나와의 인터뷰로 제가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한층 성숙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중에 사회에 진출했을 때에 나와의 만남 속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건강 잘 챙기고 살고 싶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 하며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하면서 ‘아~ 그때 송병수 할아버지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맞구나!’ 하고 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인감 됨됨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처럼 나이 든 노인들의 얘기를 듣고 싶다고 찾아와 준 학생들에게 정말 고맙고, 세대 간의 이런 소통이 우리나라를 한층 성숙하게 할 거라고 믿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터뷰하는 동안 정말 즐거웠고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또 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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