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도 보이는 달
유 혜 숙
광주광역시 북구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갈 때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를 꼽는다면 단연 부모님이 아닐까.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노래나 문학작품도 많이 있지만, 개 인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부모님의 모습은 그 어떤 작품으로도 비길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이 간직한 아름다운 추억, 비화, 존경의 마음 등등...
나도 나의 부모님 중 이제는 작고하신 아버지에 대해 간직하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
나는 2남 4녀 중 넷째다. 내 위로 언니가 한 명, 오빠가 두 명이다.
내가 태어나던 5월의 초입에는 바람은 산들산들, 햇살은 뽀송뽀송하여 밤새 진통 중인 어머니를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래고자 아버지는 집에서 빤히 보이는 강가로 낚시를 가셨다고 한다. 아기가 곧 태어난다고 오빠와 언니가 돌주먹을 쥐고 달려가 소리쳤을 때 낚시를 하던 아버지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오셨고 대문 가에 도착하자 외할머니가 ‘딸이구먼.’ 한마디 하시자 낚시 바구니를 발길질하여 담 너머로 던져 버렸다.
나는 졸지에 생선 바구니를 담 너머로 발길질할 만큼 서운한 자식이 되어버렸고, 그 일을 빌미로 용돈을 드릴 때나, 선물을 드릴 때, 여행을 모시고 갈 때 두고두고 아버지께 이 일을 들먹이며 서운해했다.
“아버지, 생선 바구니도 던져 버렸는데 나는 속도 없이 용돈을 드리네...”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미안해하셨다.
“아녀, 애기가 나왔는데 비린 것을 집안에 가지고 오면 되냐? 그래서 바구니를 던진것이지.”
그래도 외할머니의 얘기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씩씩거리며 부아가 치민 얼굴로 찬물에다 얼굴이며 손을 벅벅 씻으면서 ‘아들이나 나오지’ 라고 투덜대셨다는데...
위로 오빠가 둘이나 되는데도 또 아들을 원했던 욕심 많은 아버지? ‘많은 아들은 나의 미래야’ 하고 자랑하고 싶었던 보수적인 사나이? 하지만 내가 태어나던 50년대에는 아들 많은 것이 자랑이었던 시대가 아닌가?
아버지는 유머 감각도 뛰어나셨다. 중학교 때 일주일의 수영체험활동을 하고 돌아온 날 현관에 들어서자 “아니, 우리 딸은 어디 가고 하얀 이빨만 돌아왔누?” 하셔서 나를 울게 하였다. 아버지를 닮아 피부가 까만 나는 어린 시절 까만 피부 때문에 열등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나를 놀릴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것이 하염없이 슬프고 가슴 아프다.
‘맑고도 맑은 가을 하늘 낮에도 달이 보이네.’
이 싯귀는 아버지가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지은 글로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 앞에서 읊어주며 칭찬한 글이다.
투명한 가을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어린 소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고 맑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했을까?
아버지는 글도 잘 쓰고, 노래도, 운동도 잘하는 아주 총명한 아이였다.
큰아버지가 태어나고 7년 동안 아이가 없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십 리나 떨어진 곡성 태안사로 하루도 빠짐없이 100일 동안 다니며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 우리 아버지다. 내가 보기에 우리 아버지는 얼굴도 잘생기고, 기골도 튼튼하고, 운동신경도 발달한, 그러면서도 배움에 대해서는 끝없는 열망을 지닌 참으로 본받을 만한 바른 생활 사나이였다.
아버지는 집에서 십 리나 떨어진 국민학교를 결석 한번 없이 다녔다. 1920년대 시골 학교는 제 나이에 다니는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제 나이에 취학한 어린 아버지는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이며 키가 작았지만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소를 키우고 꼴을 베러 다녔던 아버지의 손에는 책이 항상 들려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상모(아버지의 아명) 손에 책이 있나 없나 내기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그때는 일제 강점기여서 일본인이 교장이었고, 일본인 교장은 한국 학생들을 무시하고 깔보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래서 총각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을 쫓아내자는 모의를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반장이므로 당연히 앞장서야 한다는 덩치 큰 총각 학생들에 떠밀려(?) 일본인 교장 물러가라며 데모를 했고, 그 일로 학생부에 붉은 줄이 그어졌단다. 사상이 불온한 학생이라고. 아버지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 시험을 치렀는데, 매시간 시험이 끝나면 감독관이 와서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과목마다 최고점수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시험이 끝나는 시간마다 점수를 매긴 모양이었다.)
합격자 발표 날, 명단에 이름을 찾을 수 없어 교무실에 확인한 아버지는, 학생부에 적힌 붉은 줄 때문에 1등이었으나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순천에서 월등까지 그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왔다고 한다. (지금도 차로 가도 1시간 가까운 거리다. 그때는 지금처럼 아스팔트도 아니고 길도 잘 닦여지지 않았으리라.) 어린 소년의 실망과 절망을 어떻게 표현하랴?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집안일을 도왔고, 군청에 다니던 작은 할아버지가 돈을 써서 붉은 줄을 지워주던 17살에 철도국 시험에 합격하였다. 더 배우고 싶었던 어린 소년의 상처는 그대로 자식에게 투영되어 공부에 대해서만은 어떻게 해서든 밀어줄 테니 공부만 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학교에 대한 아버지의 애착 때문일까? 우리 형제들의 개근상을 다 합치면 아마도 기네스에 도전해볼 만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우리가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파도 학교에 가서 쓰러지라고 말씀하시면서 학교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다닐 때 큰오빠가 결혼하던 토요일 하루 수업을 빼먹은 것(그때는 토요일에도 수업했음) 외에 초, 중, 고를 모두 개근하였다. 나머지 형제들도 다른 상은 몰라도 모두 개근상만은 탔노라고 자랑할 수 있다.
아버지 자신이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할 수 없었던 과거로 인해 언제나 배울 수 있는 것에 고마워하라는 말씀과 학교, 학교, 공부, 공부를 잊지 않고 살아야 했다.
또 우리 형제들은 명절이나 기쁜 날에도 화투를 만져 본 적이 없다. 나는 삼봉이나 고스톱을 알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살면서 3가지만 지켜달라고. 첫째, 도둑질하지 마라. 둘째, 노름하지 마라. 셋째, 바람피우지 마라.
산과 들에서 풀을 먹이며 힘들게 송아지를 키워놓으면 할아버지는 장에 가져가 노름과 술에 날리셨고, 고개 넘어 숨겨둔 여자는 할머니의 눈물주머니였다. 아마도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노름과 바람기를 보며 나는 저렇게 살지 않으리라 맹세하셨으리라.
그래서 우리 형제는 좋은 날에도, 슬픈 날에도 화투를 챙겨 즐긴 적이 없다.
나는 봄날에 피어나는 튤립을 보면 늘 아버지를 떠올린다. 내가 자라던 60년대에는 튤립이라는 화초를 구경하기도 키우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귀한 알뿌리를 구해 마당에 비닐을 씌워가며 곱게 꽃을 피우고, 겨울이면 방안에 고이 보관하여 다음번 봄날을 기다려 다시 심곤 하셨다. 그래서 내게 튤립은 공주를 보호하기 위한 기사의 갑옷 이야기가 아니고, 아버지의 감성, 나비 날개처럼 부드러운 꽃잎이 주는 화려한 색감, 봄날의 나른하고 달콤한 낮잠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 집 마당에는 튤립뿐만 아니라 배추며 상추도 키웠지만, 앵두, 포도, 대추, 사과나무, 무화과 그리고 연못에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집이 커다란 저택인 줄 알겠지만, 우리 집은 철도국에서 직급에 따라 배당해준 20여 평의 관사에 마당은 백 평 정도 되는 일본식 집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마당을 가진 집들이 흔했지만,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집이니까 마당은 넓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는 그네도 있었다. 이제 생각하면 참 감성이 풍부한 낭만적인 아버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는 장조림을 드시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아 고기를 매우 좋아하는 나는, 평소에는 고기가 없으면 수저도 드시지 않으면서 왜 장조림은 드시지 않는지? 알레르기가 있으시나? 하면서도 상 위에 올려진 장조림을 자식들 쪽으로 밀어주시면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한 점이라도 더 먹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저 우리에게 더 먹으라고 밀어주시나 보다 짐작했다.
어느 날 언니에게 물었다. 왜 아버지는 장조림을 안 드시냐고? 언니는 ‘나는 참 억울해.’ 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가 태어나기 전 오빠가 한 명 태어났단다. 누구나 가버린 자식에게는 더욱 애틋하고 미련이 남겠지만, 그 오빠는 참으로 건강하고 잘 생겨서 귀티가 났다고 한다. 탄탄하고 건강한 다리로 건넌방에서 통통통 하고 달려오면 그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고 늘 미소를 지으며 엄마는 회상하셨다. 마실을 나가면 웬 아이가 이리도 잘 생겼냐고 누구나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봤다고. 언니가 태어났을 때 오빠는 3살쯤 되었다고 한다. 언니의 백일 전날 엄마는 떡을 맞추러 방앗간에 가시고, 이웃집 아이의 돌이라며 가져온 떡을 오빠가 먹었는데 그 떡에 급체해서 응급실에서 밤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언니는 내 탓이 아닌데 그 뒤로 오빠의 죽음이 자기와 연관된 것처럼 찬밥 신세라고 하소연했다. 한동안 네가 백일이어서 떡을 하느라 집을 비워서 이렇게 됐다는 원망을 들어야 했고, 그 오빠가 좋아하던 음식이 장조림이라고.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남원 쪽을 지나가는데 아버지께서 어느 야산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차가 방향을 틀어도 계속 그쪽을 바라보셨다. 나는 “아버지, 저기가 어디예요? 누가 살았어요?” 하자 어머니가 “너희 큰 오빠가 묻힌 곳이다. 이 곳만 지나가면 눈을 못 떼 네. 그때가 언젠데...”하며 혀를 차셨다. 그때가 아버지 나이 60이 넘으셨으니 무려 40년 전에 떠난 자식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부모의 사무치는 마음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장조림을 절대 드시지 않던 아버지! 40년, 50년이 지난 뒤에도 아니 돌아가시던 순간까지도 먼저 가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며 잊지 않았던 아버지! 우리 형제들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을 떠난 그 오빠의 이름을 모두 다 알고 있다. 늘 귀에 익게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이제는 잊고 편하게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보다는 가슴 한 쪽에 그리도 사랑하는 자식을 간직하며 한숨 쉬고 슬퍼하는 모습이 더 인간적이고 다감하게 느껴졌다.
자식을 자기 죽음과도 바꿀 만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세월의 흐름 속에 희미해지고 무디어가는 슬픔이나 괴로움을 핑계로 쉽게 잊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위선이 아닐까?
나는 어릴 때 공부를 제법 했다. 집에 돌아오면 책가방을 벗자마자 엎드려 숙제부터하고 나서 놀았다. 또 친구들이 나를 좋아해 줘서 1학기에는 반장, 2학기에는 부반장을 도맡아 했다(반장을 1, 2학기 계속할 수 없으므로).
내 기억으로 4학년 때였다. 당연히 반장에 뽑힌 나는 퇴근하고 돌아오실 아버지를 기다리며 칭찬받을 일에 부풀어있었다.
“오늘 반장 선거했다면서?”
아버지가 물으셨다. 나는 잔뜩 거들먹거리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히 반장에 뽑혔지요.”
아버지는 내 말에는 별 반응이 없으셨다.
“그래? 네 표는 몇 표가 나왔든?”
“63명 중에서 60표요.”
“그럼 반대한 3표 중에 네 표도 있겠다.”
“당연하지. 에이~ 아빠는. 내가 나를 어떻게 뽑아.”
아버지의 표정은 어두웠다.
“우리 자식들은 그저 나 닮아서 융통성 없고 머리 회전이 팍팍 돌지도 않고...”
아버지는 한숨을 쉬시면서 돌아앉으셨다. 잔뜩 칭찬을 기대했던 나는 머쓱하고 김이빠져, 앉아있던 밥상에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화를 내셨다.
“아니, 당신 뭐하는 거예요? 얘가 오늘 반장 돼서 지금껏 아버지를 기다렸는데, 뭔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아버지의 얘기는 이러했다. 낮에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계시는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동료의 아들이 뛰어 들어왔단다.
“아버지, 나 오늘 반장 됐어.”
그러자 주위 분들이 ‘아이구, 축하한다’며 박수를 쳐주었고.
“네 표는 몇 표나 나왔니?”
그 아이는 자기 아빠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몇 표는 무슨. 전부 다 내 표야.”
했다는 것이다.
“아니, 네 표는 어떻게 하고?”
“나 밖에 할 사람이 없는데 누구를 찍어? 나도 나를 찍었어.”
아이의 대답에 사무실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고 ‘보통 놈이 아닐세’ 라며 모두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3학년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삶에서 자식들이 벗어나기를 바라셨을까? 보통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이 아닌 남보다 앞선 비상한 사고를 하는 자식이 되기를 바라셨을까? 물론 나쁜 방향으로 비상하기를 바라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유당 시절 많은 동료가 철도국의 물품을 빼돌리고 업자와 결속해서 공금을 횡령해도 아버지는 그 일에 가담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횡령으로 직장을 잃으면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가 없다고, 무슨 일이 생기면 뒤를 봐줄 배경도, 재산도 없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들은 다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고 아버지를 무능하다고 놀리셨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가 든든하고 좋았고 존경스러웠다.
이렇듯 아버지는 장점도 단점도 있는, 다른 사람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열심히 사셨고 자식들에게 교육이라는 자산을 물려주려고 노력한 분이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큰 바위 얼굴처럼 내가 따르고 닮아야 할 이상이었고, 아버지의 그림자는 내 인생에 커다란 의미를 드리웠다.
나는 딸이지만 아버지를 닮아서 좋다. 직장에서 육상과 축구선수로 뛰었던 아버지를 닮은 튼튼한 종아리며, 부지런한 사람이 가진다는 토실토실한 손등과 통통하고 짧은 손가락 그리고 까무잡잡한 피부까지도.
오늘따라 더 보고 싶은 아버지!!
오늘따라 더 그리운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서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많이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 인생의 선배요, 스승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런 말을 듣는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