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의 축복
황 점 갑
서울시 동대문구
- 엄마가 딸이 되고 딸이 엄마가 되다.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엄마의 숨 쉬는 소리를 먼저 확인한다.
92세의 어머니는 치매로 고관절 골절로 인하여 오래도록 누워만 계신다. 부모는 열자녀 거느려도 자녀들은 한 부모 모시기에 힘들어한다는 말과 같이 오래도록 어머니를 간병하기란 어느 누구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녀인 나는 나 때문에 우리 가문이 잘되기를 나 때문에 형제자매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의 딸이 아니라 내가 이제는 엄마의 엄마가 되어서 일 평생 한번 자유롭게 편한 삶 살지 못하셨던 8남매의 엄마를 조금이나마 값을 치르고자 다짐을 하면서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퇴소하게 하여 모시고 있다.
은퇴하고 여기저기 봉사를 하던 중 하루는 데이케어에서 힘들어하시는 노부모님들을 섬기면서 내 엄마를 깊이 생각할 때 봉사는 다음에 해도 되지만 내 엄마가 내일이라도 돌아가시면 언제 엄마에게 효도 하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세상에서 우리 장모님같이 훌륭하신 분은 없다. 8남매를 출산하시면서 미역국 한 그릇 못 잡수시고 고생하신 분 아들들이 모시지 않는다면 장녀인 당신이 모시도록 해.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복 받아. 내가 혼자 살 각오하겠으니 사시면 얼마나 사실지 모르니 잘 모시도록 하라는 것이다..그대신 약속 하나
하자. 절대로 엄마를 모시면서 힘들 때라도 화내지 말라는 것이다. 약속을 굳게 하고 허락을 받았다. 동생들과 의논을 하지만 모두가 이제 도움을 받고 살 나이에 어떻게 모시려고 하느냐며 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 내가 어머니를 요양원에서 모셔놓고 때로는 형제자매들을 원망도 하고 불평하는 일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다짐을 하고 우선 살 집을 마련하여 현재는 행복하게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
- 엄마가 말씀하지 않기에 나도 말하지 않으리.
엄마는 아들 셋 세상에 둘도 없는 자녀들이다. 이 세상에 어떤 부모라도 다 그런 것이지만 남다르게 아들을 챙기신 경북 안동의 대종가 집 며느리였다.
혹독한 시집살이 하신 엄마는 절대로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에 평생토록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을 하였다 하더라도 야단 한 번 치시지 않으셨다. 8남매를 키워도 매 한번 야단 한 번 한 적이 없다. 아들 며느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말하지 않는다. 잘잘못을 지적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오래도록 병원에 입원하셨지만, 엄마 혼자서 수발을 다 하셨다. 자녀들이 어쩌다 면회 가면 바쁘다고 빨리 가라고만 하신 분이다. 퇴원하여 자식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한다고 90세가 넘은 두 분이 따로 사신 것이다. 한쪽 마비로 엄마를 의지하고 지팡이로 사시던 아버지는 92세로 별세하시고 그토록 고생하시던 엄마가 아버지 수발 끝나고 조금이라도 편히 사시는 날이 있을까 했는데 이제는 평생 누워만 계셔야 하는 것이다.
매일같이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만 계시기에 생각이 많으시고 속이 깊으신 엄마는 자녀들이 오지 않는가 하고 기다리면서 적적해하시지만, 말을 하지 않으신다.
명절 때 한번 다녀가면 그뿐 연락도 없이 너무나 자유로움으로 살아가는 동생들을 볼 때면 한번 말하고 싶지만, 엄마가 말씀하지 않기에 나도 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엄마에게 물어본다. 며느리고 아들들이 전화 한 통도 없네. 안부도 없이 궁금하지도 않나 봐. 엄마 내가 말해볼까? 하면은 말하지 마라, 하지 않는 저거들이 잘못된 것이지 그러면 되나? 못된 자식들 가만두어라, 사람이면 언제든지 뉘우칠 때가 있겠지 하시고는 고개를 돌리신다. 그리고는 밤에는 혼자 중얼거리신다.
모두 다 죽었나? 한 년 놈도 오지 않는다. 다 뒤졌는지 손자 손녀들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노래처럼 하신다. 이럴 때는 치매현상이구나 절대로 이런 분이 아닌데..
하고서는 지나버린다. 다음날 나는 이해시킨다. 바쁘고 멀어서 못 오지만 마음은 엄마에게 있어서 이렇게 엄마가 잘 지내고 있잖아?
엄마의 마음을 아는 나는 그들의 몫까지 해야 했다.
음식을 드릴 때도 오늘은 큰아들이 엄마에게 다음날에는 둘째 아들이.... 8남매의 이름을 부르면서 엄마에게 먹여드린다.
- 엄마는 나의 축복
나는 엄마와 함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남이 느껴보지 못하는 엄마와의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엄마와의 뽀뽀가 엄마를 즐겁게 하고 나도 엄마의 따스함을 맛보아 너무나 행복하다. 머리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삶의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한 사랑을 알게 한다. 엄마도 나를 키울 때 이렇게 행복하였을까?
엄마의 대변도 소변도 하나도 귀찮게 여겨지지 않는다. 엄마도 나 어릴 적 이런 마음이셨겠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엄마의 기저귀를 갈 때면 힘들어할 텐데. 그러나 힘들어도 나는 좋아하고 하면은 조금도 힘들지 않는다. 오늘은 큰 며느리가 하는거야. 내가 하는 것 아니야. 다음에는 둘째 며느리가 하는 거야. 또 다음날은 오늘은 셋째 며느리가 하는 거야 하고 마음속으로 며느리의 사랑을 받는 엄마가 되기를 바라면서 속으로 엄마의 못다 받은 사랑을 다 받고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의 섭섭함을 다 내려놓고 깨끗한 마음으로 남김없이 다 버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른 자녀들이 해야 할 몫을 내가 대신해야만 했다.. 참으로 이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아름다운 세상에 소풍 왔다가 기쁘게 떠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어느 날 밤
엄마는 혼자서 중얼중얼 하신다. 열차야 가지 마라 나하고 같이 가자!
내 옷 다 어디 있나? 내 신발 어디 있느냐? 고 빨리 가야 한다. 큰소리치시면서 나를 부르는 것이다. 난 옷장에 옷을 다 꺼내 보여 드리고 신발장에 있는 신을 보여 드렸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나를 칭찬하신다. 어찌 그렇게 잘해 두었느냐고,,,
조금 있으니 또 중얼거리신다. 고무신 신고 백두산에 올라가 백도라지 한 뿌리만 캐어도 시아버님 반찬은 충분하다는......
나는 마음이 찡하였다. 내 몸을 주신 내 어머니 무엇으로 보답할까, 지금이라도 눈 감으시면 다시 볼 수 없는 내 어머니 생각에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는 것이다.
나는 다짐하고 다짐한다. 내 모든 것 다하여 엄마의 심정으로 자녀를 돌보듯 엄마를 케어하리라고,,,,
하고자 하는 이 마음에 피곤함이 나를 덮을 수 없고 그 무엇도 나를 누르지 못하리라.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이길 힘주시리라 믿고 힘차게 가리라.
- 엄마의 고된 시집살이
엄마는 19세에 첩첩산중인 경북 안동 개골이라는 산속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꽃가마 타고 와서 내리고 보니 앞도 산이요 뒤도 산이라 아주 작은 두메산골인 것이다.
2남 2녀의 맏딸인 엄마는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한 아주 예쁜 처녀로 박씨 문중에서 사랑을 받고 잘 자란 선비의 딸로서 몹시 가난하고 못사는 농사꾼인 아버지께 시집을 온 것이다.
가마에서 내리고 보니 이제는 길도 몰라 도망도 갈 수 없는 산골에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모시고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너무나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시어른 모시고 살아가는데 낮에는 데레기를 옆에 차고 산으로 들로 나가 나물을 때로는 소나무 껍질을 벗기어 쌀 등겨라는 것으로 버무려서 떡과 죽을 끓어서 먹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첫딸을 낳고 둘째 셋째 딸을 낳으니 할머니는 아버지를 새장가 보내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구박하시는 것이다.
엄마를 가라고까지 했다고 하나 도망가는 것을 몰라 그럭저럭 살다 보니 넷째는 아들을 낳고 모두 8남매를 낳았던 것이다.
8남매를 낳아도 너무나 가난하여 미역국 한번 못 잡수시고 몸조리 하루도 해본 적이 없이 출산하고는 바로 나와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내가 내 동생 출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도 일하시다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셨다. 할머니는 볏짚 한 단을 방안에 던지면서 여기에다 아기 낳으라고 하시면서 마당에서 볏짚 단을 방으로 휙 던지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엄마는 어린 나에게 일을 시킬 수밖에 없어 엄마는 나보고 작은 솥에 호박 넣고 물 붓고 소금 넣고 나무로 불을 지펴 국을 만들라고 하고선 아기를 낳으신 것이다. 엄마는 혼자서 애기 태를 끊으시고 혼자서 다 정리하시고는 조금 있다가 나와서 저녁밥 준비를 하시는 것이었다.
난 그때도 철없이 모르기에 엄마는 다 그렇게 하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서 울 엄마만큼 힘들게 사는 사람 또 있을까 생각한다.
어쩌다 시골 장날 아버지가 고등어 한 손을 사오면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상에만 올린다. 할아버지는 엄마를 생각하고 잡수지 않고 며느리에게 주면 엄마는 “아버님 드세요”하고는 드리면 결국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옆에 있던 내가 먹을 때도 있었다.
엄마는 자라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풍부하여 많은 이에 덕망이 높으며 엄마로부터 배운 점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 당시에 시집 장가들면 사돈끼리 서신을 주고받는 사돈지라는 서식이 있는데 누구든지 혼사가 있으면 엄마가 먹을 갈아 붓글씨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그것도 엄마가 많이 하셨고 문중에 대소사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 물어보곤 하였다.
모든 면에 유식하던 엄마는 자식만큼은 배우게 하려고 온갖 고생을 다 하시며 심지어는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게 일하시면서 자신은 불태우신 분이다.
천리만리 먼 곳 도시로 보내어 공부하게 한 것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여자 공부시켜서 무엇하느냐? 고 심지어는 그렇게 일하면 몸이 상해 일찍 죽는다며 별의별 욕을 다 들어가면서 8남매를 도시로 보내 배우도록 하셨다.
아들 셋, 딸 다섯을 위해 엄마의 인생 모두 수고와 슬픔뿐이지만 그래도 아빠, 엄마는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므로 자랑뿐이고 기쁨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시며 장날에도 파단을 머리에 이고 나가 팔아서 심지어는 온종일 굶주리면서 어떤 때는 배고프면 끈을 허리에 매고 다니다가 꽉 졸라매면서 배고픔을 이기곤 하시고 했던 부모님들이다.
새벽 어둑어둑하여 길도 잘 보이지 않을 때 엄마 아빠는 꽁보리밥, 고추장, 된장, 물 가지고 일터로 나가시면 땅이 보이지 않아 일 할 수 없을 정도는 집으로 들어와 엄마는 소죽을 끓이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는 부엌으로 가서 초롱불 켜놓고 저녁밥을 만들곤 하였다. 산속에서 살기에 반찬은 늘 호박에 물 붓고 소금 넣으면 쉽게 국을 끓이는 것이다.
혹시 불을 땔 때 곡식 한 알이라도 있으면 줍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자부에게 어찌하든 알뜰히 살아서 잘살아라....부탁하고 돌아가셨기에 지금도 우리에게 밥 먹을 때 밥 한 알도 흘리지 말고 먹으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 아빠의 노름과 엄마의 선한 마음
우리가 알곡을 먹고 살면서 똑바로 살아야 하고 무엇이든지 정직하게 살아야 하며 남에게 해가 되면 안 된다고 교훈하실 때면 하시는 말씀이었다. 베풀고 살아야 한다는 엄마는 식사하려고 할 때도 이웃분이 오면 엄마는 그분에게 밥을 주고는 엄마는 나중에 먹는다고 하고선 못 잡수 실 때가 많았다.
이런 삶 가운데 아버지는 조금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노름하시고 며칠 동안 집에도 안 들어오시고 노름을 하시면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이 잃어버리는 것을 도로 찾고자 몽땅 잃고선 노름빚 때문에 일 년 농사지은 콩이고 보리고 모두 가지고 갈 때가 많았다. 그래도 엄마는 수년 동안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해 아버지를 나무라도 곡식 가지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 남편이 저지른 일 다 가지고 가더라도 내년에 농사지을 씨앗은 남겨 놓고 가라고 애걸을 하는 것 뿐이었다. 노름빚 받으러 가서 엄마처럼 하는 이 한 사람도 없다면서 미안해하
면서도 노름빚은 인정사정도 없이 가지고 가버린다.
아무리 말려도 혈서를 쓰면서까지 노름판에 다니시는 아버지를 말릴 수가 없었다.
마음 좋은 아버지는 이용당하면서 끌려가시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남편과 살면서도 아무리 아파도 약 한 번 산 적 없고 심지어는 넘어져서 팔목이 골절되어 아파도 병원에 가시지 않고 그 팔을 끈으로 묶어가지고 살림 살며 농사일을 하셨다. 그래도 자녀들은 아무도 몰랐고 아버지가 구루마에 치어 다리뼈가 부러져도 말없이 두 분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만 했던 것이다. 오직 자녀들을 위해 이토록 하셨으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들은 알지 못했으니 나중에 손목뼈가 튀어나와 물어본 즉 얘기를 하셔서 알았다.
두 분 모두 일로 인해 육신은 만신창이 되도록 삶을 사신 것이다.
그래도 부모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 그렇게 하는 줄만 알고 살아가는 현실을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오늘은 유난히 창가의 햇살이 침상을 환하게 비쳐온다, 습관처럼 어머니의 숨소리를 확인하는 나는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니 두 눈에는 눈물만이 나를 붙잡는구나.
딸을 보고도 선생님이라고 하는 엄마의 모습, 자녀들도 몰라보는 엄마의 모습, 좀 더 편히 사시기를 바라요. 받지 못한 사랑을 다 받으실 때까지 오래오래 사시면서 평안하세요. 엄마가 자녀들에게 희생하신 인생을 딸이 엄마가 되어서 그 사랑 최선을 다할게요. 믿어주세요, 어머니!!!!!!! 사랑해요.
엄마의 삶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우리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