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를 지켜낸 달빛 인생
이 영 화
대전시 중구
나는 자수성가한 1938년생. 올해 나이 78세이니 내일모레면 80이다.
세상살이가 좋아져서 참 오랜 시간 다행스럽게 잘 살아왔다. 먼 옛날 벼슬아치들의 귀양지였던 진도에서 4남 7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모든 게 어렵던 전염병으로 3남 1녀가 사망한 후, 나는 아버지 연세가 40 중반이던 때, 늦둥이로 태어나 잦은 병치레를 하며 성장했다고 부모님께 전해 들었다. 그래서 남은 1남 6녀 중 유일한 아들로 유난히 넘치는 보살핌과 사랑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생전에 나를 바람 앞에 촛불 같다고 하셨다. 전염병으로 형들을 다 잃은 고통이 컸기에 금쪽같이 귀한 늦둥이 외아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생사를 걱정하던 내가 어느새 성인이 되고 가정을 이루어 자식 교육을 마친 노년이 되었으니 세월 참 빠르고 인생이 무상하다. 삶의 의미를 알게 되며 인생의 황혼에 서고 보니 헌신과 희생으로 자신보다 자식을 더 아껴주신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부모님은 외동아들에 대한 교육과 장래를 위해 해방되던 해에 육지로 이사했다.
대대로 조부모님께 물려받아 경작하던 전답을 처분하면서까지 자식 교육에 온 힘을 다하셨다. 이사를 하면서 힘겨운 타향살이에 풍족했던 재산도 고갈되고 불행이 겹쳐서 전쟁까지 겪게 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굶기를 일상으로 여기며 피난하러 다녀야 했다. 우리 가족은 이불로 몸을 휘감고 총알을 피해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다. 그중에 나 혼자만 겨우 초등교육을 마쳤으니 그래도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나를 예의 바르고 부지런하며 꼼꼼하고 손재주가 좋다는 말씀을 하시며 상급학교 진학을 간곡하게 권유하였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한 끼의 생계를 걱정하며 곤궁했던 시절이라 늙으신 부모님은 절망 속에서도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보따리 행상을 하였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한 실제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기에 아쉽게도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다. 막막한 현실에서 진학포기의 설움도 잠시, 선생님 말씀을 떠올리며 며칠 동안 장터를 떠돌다가 작은 모퉁이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남의 가게 벽에 기대어 입간판 옆에 조그만 좌판을 놓
고 라디오나 라이터, 시계 등을 고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여름에는 고장 난 우산으로 햇빛과 비를 가리고 겨울에는 낡은 천막 천으로 눈보라를 가리며 지낸 한 평 남짓 작은 곳이었다. 그래도 나만의 공간에서 가족을 책임진다는 뿌듯함과 손님들의 손재주 칭찬에 기쁜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게 낯선 타향에서의 생존이 내게는 끝을 모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형제가 없는 외둥이 늦둥이로서 나와 더불어 지내며 보호해 줄 울타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형제가 많은 친구가 늘 부러웠다. 그래서 미리부터 피해를 본 것 같은 조바심 속에 내가 먼저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양보하여 신뢰를 쌓고 지냈다. 교복을 입은 또래를 보면 그저 부러움에 내 마음이 다칠까 봐 먼저 외면했다. 누구든 내 앞에서 시비를 걸면 조용히 비켜주고 때로는 나의 권리를 포기하기도 했다.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나날들이 계속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활이 몸에 배어서 일찍 철이 들었던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예의 바르다는 평도 들었다.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생업에 뛰어들면서 또래보다는 윗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소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자 공부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위해 야학에 다닐 기회를 찾았다. 드디어 내게도 배움의 기회라는 행운을 줬다. 종일 시장의 모퉁이에서 땀내가 베인 차림이었지만 저녁이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던 시절은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어서 행복한 시절이었다.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비벼가며 겨우 고등공민 과정을 마치고 생업도 경륜이 쌓이면서 조금 더 규모 있게 사업도 확장할 수 있었다. 청년 시절에는 가내수공업으로 면직공장을 운영했는데 사람을 부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늘 중요하게 생각했던 터라 작업장에서 불성실한 직원에게도 젊은 책임자로서 반복적인 지시나 직언을 줄이려 잔업을 혼자 처리하기도 하였다. 장터에서 다양한 삶을 경험하면서 인연이 된 사람들에게도 남의 고난이 내 것인 것 같아 쉽게 호의를 베풀었다가 서운한 감정만 남은 채 손해를 입는 일도 많았다.
내 나이가 성인에 가까워지자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외둥이를 서둘러 혼인시키려는 부모님의 뜻은 내 뜻과 무관하게 양가 부친의 정혼으로 결실을 보았다. 부모님 말씀에는 거역 없이 생활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부모가 정혼한 지금의 아내와 얼굴도 안 보고 이십대 초반에 다소 이른 혼인을 하였다. 그것이 우리 부부 인연의 시작이었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날! 그날을 생각하면 어색함과 부끄러움에 지금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나중에 중매쟁이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아내는 부모가 정혼한 결혼을 약속하는 약혼 사진을 찍어야 했기에 사진관이 있는 읍내에 처음 나온 날이었단다. 뿌연 먼지를 날리며 요란하게 달리는 시골 완행버스도 처음 탔다고 했다. 나는 읍내에 살았지만, 아내는 작은 면 단위 지역에서도 더 깊숙한 산골에서 거의 자급자족하다시피 한 고립무원 같은 집성촌에 살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잔뜩 굳은 표정과 부동자세의 어색함으로 가득 찬 사진 촬영이 끝나고 나는 예비신부를 대접하기 위해 큰맘 먹고 요리 집을 찾았다. 요리 집이라고 해야 중국집이 전부였고 대부분 서민은 외식을 생각도 못 해보는 시절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경제활동을 하는 터라 예비신부를 위해 나름 거창하게 짜장면과 탕수육, 팔보채까지 주문했다. 예비신부는 통치마 한복차림에 얼굴빛이 하얗고 맑았다. 곱게 빗어 땋아서 목선 앞으로 늘어뜨린 까만 양 갈래머리까지 아주 다소곳한 인상이었다. 예비신부는 의자에 앉았지만, 어깨를 덮은 길이의 땋은 머리가 식탁에 닿을 정도로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는 남녀가 유별한 시절이고 나 역시 어린 나이에 생업에 전념하다 보니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던 때였다.
어색한 기운만 감도는 식당에 마주 앉아 누가 먼저 음식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나 역시 식사를 권하기만 할 뿐 같은 태도를 반복하며 유지하고 있었다. 급기야 시골 버스 시간이 되었고 그토록 귀한 음식에는 손을 대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식당을 나오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포장이라도 해달라고 했겠지만, 그땐 정말 그런 생각도 못 했다.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을 준비했던 식사를 그대로 놓고 나와서 지금 생각해도 아깝고 속상하고 또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웃음만 나온다. 우리 부부는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는 그날 버스를 처음 타서 멀미하였고 읍내 구경도 처음이어서 무섭고 겁이 났단다. 낯선 곳에서 살아갈 일도 걱정이고 낯선 남자도 처음이라 혼란스럽고 정말 힘든 하루였다고 했다. 그런 사연을 시작으로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이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늘 같이 박장대소하면서 지금껏 잘살고 있으니 우리 부부도 대단한 인연임이 틀림없다.
첫 아이가 태어나던 날은 내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마냥 예쁘고 신기한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부모와 가장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무거운 책임감으로 무장하며 살았다. 자식에게 헌신하신 부모님은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을 우리 부부보다 더 크고 무한한 사랑으로 길러 주셨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결혼 전부터 내가 운영했던 가게 일에 전념하며 칠 남매를 뒷바라지할 수 있었다. 늦둥이 외아들로서 늘 외롭던 내게 아내와 점점 늘어나는 2남 5녀의 내 자식들은 나를 진정한 부자의 마음으로 살게 해준 보물들이었다. 남존여비의 의식이 짙게 남아있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아이가 태어날수록 내리사랑 때문인지 더욱 예뻤고 소중한 나의 혈육들에게 공평하게 사랑을 나누어 주며 그렇게 교육하고 성장하도록 뒷바라지하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마음속의 사랑과 다르게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하려는 부모의 욕심으로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엄격하게 교육하였다.
나의 방식에 아쉬움도 있지만, 아이들은 다행히 나의 교육방침에 잘 따라 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는 태생적으로 혈육에 대한 애착과 성취 욕구가 큰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어릴 적부터 내가 받은 사랑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이 세상을 하직하시던 날, 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눈앞이 캄캄했다. 가난과 전쟁 속에서도 가족을 지켜내시고 노녀의 병석에서도 평생을 나만 바라보고 나만을 위해 기도하며 무한한 사랑을 주셨던 부모님이셨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두 분에게 마음으로 기대로 상의하며 지지받고 지내다가 갑자기 어미를 잃고 홀로 남은 아기 새가 된 기분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정성을 다했지만, 이 좋은 세상을 다 보지 못하고 병석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겁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일곱 아
이를 보면서 이제는 정말 가장으로서 혼자서 삶의 문제를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우리 가정의 경제를 비롯한 삶에 대한 모든 운명이 내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사업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 가게는 아내에게 미루어 두고 대리점 사업이라든가 약초 재배, 건설업 투자, 간척지 개간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끌게 되었고 실패도 경험하였다. 마지막 간척지 개간을 할 때는 손발톱이 빠지도록 춘하추동 불철주야로 온 힘을 기울였다.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농토에서 자라는 곡식으로 가득 찬 들판을 보며 감격에 취하기도 하였다. 낯선 땅에서 주위의 질투와 반목을 견디며 일구어낸 농토를 농약에 중독될 정도로 혼자 감당하다 보니 과로로 쓰러지기도 하였다. 부모님은 살아생전 명절마다 꼭 이웃을 챙겼다. 어릴 적 선물을 들고 이웃에 심부름을 가면 밝은 표정으로 칭찬하고 고마워하던 이웃들을 보며 나도 뿌듯했었다. 덕분에 부모님처럼 노력으로 일구어낸 것들을 나만 가진다는 생각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나눌 때 나의 기쁨도 더욱 커지는 경험을 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살아오면서 외둥이인 나의 생활신조는 자연스럽게 주위와 더불어 잘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꾸준히 사회와 이웃에 관심을 가졌다. 상인회 업무, 의용소방대, 시청 봉사활동, 보육원 기부, 지역사회 전통문화 보존 등에 물심양면으로 관심과 지원을 지금껏 지속해 왔다. 그러나 세상에는 늘 내 생각과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어느새 중년이 지나갈 무렵 신뢰와 우애로 평생을 함께 지내고자 했던 주변인과 친인척들의 배신을 경험하게 되었다. 마음의 상처를 입고 몸과 마음의 병을 얻어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내 인생에서 손으로 꼽을 만큼 힘들고 끝 모를 어둠의 시간이었다. 다시 마음을 정돈하고 주변을 돌아보니 늘 내 옆 같은 자리에 아내와 내 인생의 보물인 일곱 남매가 오롯이 그대로 있었다. 익숙하고 편안한 가족의 표정에서 내게 사기와 배신을 던진 타인들과 어두운 시간에 매달려 있는 내가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늘 가까이 있는 가족과의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잠시 잊고 지낸 것 같았다. 내 행복의 상징 같은 일곱 개의 보석 같은 아이들을 모두 교육하고 출가시키니 그 옛날 식당에서 아내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둘만 남았다. 이제는 우리도 노년이 되어 가끔 건강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소중함이 더욱 간절해진다.
아내는 노부모와 시누이 여섯이 있는 집에 외아들 며느리로 시집왔다. 낯설고 물선 환경 속에서도 온갖 힘든 일을 다 견디며 살았다. 칠 남매를 낳아 기르는 사이 위험한 고비도 서너 번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무사히 회생하였고, 별말 없이 별탈 없이 지내 주었다. 크게 열정을 표현하지도, 그렇다고 크게 상심을 표현하지도 않고 무심한 듯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온 아내였다. 50여 년을 하루같이 그 일이 삶 전부인 것처럼 가게의 차가운 바닥을 떠날 줄 모르고 천직 삼아 지금까지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 아내가 크게 아파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되던 날 설명할 수 없는 허망함에 나도 많이 힘들었다. 이제는 내 곁에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아내를 생각하면 지난 인고의 세월에 대한 대단함에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십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곱 아이를 낳고 기르며 몸도 마음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안쓰럽다. 남자라는 이유로 애써 모른 척했던 시간이 부끄럽기도 하다. 그런데도 항상 곁에서 둘이 함께 이루어온 우리의 삶이기에 시간이 갈수록 더 아름답고 소중하다.
부끄러움과 설렘으로 아내와 처음 만났던 날, 첫아이부터 막내까지 새 생명이 탄생하던 날, 넘치는 기쁨으로 손수 짚으로 줄을 꼬아서 금줄 쳐 주시던 아버지와 정성으로 산바라지 해주시던 어머니, 아이가 아파서 둘이 서로 아이를 안고 밤을 새우던 날, 아이를 입학시키고 졸업시키며 기념 사진 찍던 날, 일곱 아이가 모두 성인이 되어 내 손을 잡고 결혼식에 입장할 때 눈물을 훔치며 잡은 손을 배우자에게 건네주던 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하늘이 캄캄했던 날, 사업의 실패와 배신으로 울부짖던 날,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를 안고 응급실에서 쓰러졌던 날 등등.
수많은 희로애락의 날들이 우리 삶을 더욱 탄탄하게 하여 모두 아름다운 영화의 장면처럼 선명하게 스쳐 지나간다.
나는 지금도 스스로 움직여 일하고 운동하며 친구를 만나 가끔 함께 식사도 한다.
작은 지역사회 활동도 하고 아직 소소하나마 경제적인 수입이 있고, 경제력도 부족하지 않게 자주적 자립적으로 살고 있다. 가끔 일곱 자식이 긍정적인 소식을 전해줄 때마다 그들이 사는 모습에 기쁨을 느끼며 크게 부족함 없이 잘 지낸다. 학자들은 인생의 황혼기에는 삶이 통합되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수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욕구가 다른 것처럼 모든 노년의 생각도 다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인생의 마무리를 떠올리면 아쉬움이 남는 몇 가지가 있다.
세상이 변한 것인지 내가 너무 고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조금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님이 나를 풍전등화로 여기셨던 것과 별개로, 스스로 내 인생을 풍전등화처럼 만들고 어렵게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내 인생이니 내가 조금 더 편안하게 꾸려볼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과 위태롭기만 했던 내 인생을 지켜냈다는 다행스러움도 마음속에 함께 있다.
아쉬움에 대한 하나는 배움에 대한 욕구이다.
늘 배움이 부족한 것에 대한 갈증으로 부족함을 채우고 성취하기 위해 너무 쉼 없이 사소한 일에까지 매진했던 것 같다. 나대로의 모습으로 여유를 갖고 자연스럽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에 대한 둘은 인간관계에 대한 신념이다.
내가 최선을 다해 잘 대하기만 하면 모두 나와 안전하게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사람은 타인에 의해 조절되지 않고 결국 자기 의지대로 자신의 인격만큼 살아간다는 것을 기대나 실망 없이 그대로 인정했어야 했는데......
아쉬움에 대한 셋은 자녀교육에 대한 견해이다.
부모는 권위를 지키며 자녀에 대한 무한책임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도 성인이 되고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만큼 살아낼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다. 완전히 믿고 마음을 놓았더라면 내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들과 지금보다 조금 더 편해졌을 텐데......
한없이 조금 더 잘해주려는 마음을 놓지 못하여 나와 다른 마음일 때 서운함과 불편함으로 만들어진 어색함을 경험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행스러움에 대해서는 결국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으로부터 인정과 수용이 갈수록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이제는 더욱더 내게 가장 소중한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타인에게도 있는 그대로 여유롭게 인정하고 편안하게 바라봐 주어야겠다. 더는 가물가물 불안하게 흔들리는 풍전등화가 아니고 한결같이 어둠을 밝히는 은은한 달빛처럼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같은 모습으로 편안하게 지긋이 머물고 싶다.
오래전 노년의 내 아버지는 손주들을 끝없는 사랑과 긍정으로 어루만지고 지지하며 보살펴주셨다. 나의 노년도 내 자식과 손주들에게 내 아버지처럼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할아버지처럼 불편하게 가르치지 않고 평온하게 칭찬만 하는 내 아버지의 인자함을 더 많이 담고 싶다.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은 나대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시간이 늘어가기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더 많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여길 수 있도록 존중을 실천하는 삶이 되고 싶다. 이런 내 인생 참 괜찮다. 아내와 지금처럼 오래 함께 지내고 싶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매 순간 감사하다.
다가오라~!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맞이하리니, 점점 더 좋을 나의 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