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도 자식이잖아요.
조 원 표
경기도 부천시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은 검정 고무신에 책 보따리를 매고 산으로 들로 걷고 뛰어서 학교에 도착하면 어느새 배에서는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다.
“야, 오늘 뗀따 할래.”
‘뗀따’라면 당시 우리가 쓰던 은어였는데 학교에 안 가고 놀다가 하교 시간에 맞춰서 집에 가는 것이었다. 학교에 안 가고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기도 쉽지는 않았다.
집에서 싸왔던 누룽지는 아침나절 다 먹어버리고 점심때쯤 되어서는 허기를 달래려고 동네 어른들의 눈을 피해 큰 바위틈 속에서 생라면을 부숴 먹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야, 잎담배 한번 피워볼까?”
친구는 바위틈의 어느 구석에서 잎담배와 성냥 그리고 종이를 꺼내 가지고 왔다.
잘 피우지도 못했던 담배를 호기심에 ‘콜록콜록’ 소리를 내며 한창 피워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큰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아,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 겨?”
갑자기 호통을 치는 소리가 있어 조바심 속에 바위 틈사이로 내다보니 동네 아저씨였다. 아저씨께 끌려 집에 돌아와서는 학교 빼먹고 담배 피운 죄로 홀딱 벗고 저녁 늦게까지 동네 우물을 돌아야만 했고 어머니께 부지깽이로 실컷 얻어맞고 학교 안 간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평소에는 다정다감했던 어머니께서 그때는 정말 무서운 호랑이로 돌변하셨다.
등하굣길에도 코스모스가 있어서 심심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놀이하고 소꿉장난을 할 때도 도로 양옆으로 활짝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언제나 방긋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신작로 가에 서서 해맑게 웃고 있는 코스모스의 가냘픈 흔들림 속에서 우정의 꽃이 피어났고 신작로 가에 우리가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서 소담스레 피어오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쁨도 가득 피어올랐었다. 발이 부르트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도 형형색색의 코스모스를 보고 있노라면 피로가 싹 풀렸다. 그때는 ‘애향단’이라는 활동이 있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 길도 쓸고 때로는 빈 공터에 콩도 심었고 마을 입구 행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기도 했었다. 코스모스에 앉아있는 벌을 잡으려다 벌에 쏘인 적도 있었고 길가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꺾어다가 물병에 꽂아 두고 향기를 맡기도 했었다.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해보면 코스모스와 같은 들꽃들과 더불어 사랑을 속삭이며 욕심 없이 살면서 친구들끼리 변함없는 따뜻한 우정을 꽃피웠던 것 같다. 새해에는 개처럼 성실하고 충직하며 코스모스와 같이 서로 간에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여름날에 겪었던 화장실의 구렁이 사건은 지금도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일로 기억되고 있다. 낮에 밭에서 따온 참외를 많이 먹었던 탓인지 배탈이 나서 저녁때쯤에는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한 참 일을 보고 있는데 왠지 화장실 밑바닥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내 고추를 물어버릴 모양으로 잔뜩 똬리를 틀고 있었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바지도 올리지 않은 채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집안 식구들은 “무슨 일이냐?” 며 한바탕 야단법석이 났고 어머니께서 어디서 그러한 용기가 나셨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대기를 가지고 구렁이를 끄집어내어 처리하는 것으로 대충 일이 일단락되었다.
무더위가 한창인 여름날, 서울로 돈을 벌러 가셨던 둘째 형님께서 사 오신 달콤한 수박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하고 좋았던지 그날 이후로 동네 사람들이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바로 “수박장사예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도 수박 장사를 하면 수박은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누님께서 큰마음 먹고 사 오신 귤 한 상자를 밤새도록 모두 먹어 치운 기억이 있다. 어찌나 맛이 달콤했던지 한 상자를 먹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손바닥이 노랗게 변해있었고 어머니께 크게 혼이 났었다.
가을걷이 때 우리 집 식구들은 온 가족이 일개미들이 정신없이 먹이를 물어서 나르는 것처럼 벼를 베어서 논두렁 한가운데에 볏 집단을 태산만큼 크게 쌓아놓아야 일이 끝났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져서 주변이 캄캄해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면 “형님, 그만 들어가 유.” “그래, 너희들은 먼저 가거라. 내가 마무리를 할게”라며 마무리까지 완벽히 하시고 나서야 집으로 오셨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볏 집단 쌓기가 힘들었을 텐데도 동생들을 사랑하는 큰형님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이야 철이 들어서 형님의 그런 소리에도 눈치 빠르게 행동
을 했을 텐데 ‘얼싸 좋아라.’하고 얼른 형님만 남겨둔 채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싫은 내색 안 하고 마지막까지 마무리하는 것은 늘 형님의 몫이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의좋은 형제’는 교과서의 얘기였다. 형은 힘들어도 내 몸만 편하면 된다는 식으로 집으로 달려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가을걷이로 수확해 놓은 콩과 팥이며 고추 등을 말리느라 우리 집 앞마당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가을걷이로 거두어들인 농작물로 꽉 들어차 있었다. 씨받이로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옥수수를 쳐다보면 마음도 풍성해져서 괜히 기분까지 좋아졌다.
마당 한가운데 심어 놓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빨갛게 익은 감을 큰 형님은 긴 대나무에 감을 쉽게 딸 수 있도록 특별히 갈고리를 만들어서 바구니로 몇 바구니를 따서 큰 항아리에 물을 넣고 우려내면 이튿날 떫은 감도 달고 맛있는 감으로 변신하였다. 그래도 겨울에 까치가 먹으라고 몇 개는 안 따고 남겨두기도 했다.
호박, 가지, 토란대 등의 나물을 가을볕에 말려야 색과 맛이 오래 보존된다며 어머니께서는 늘 햇볕만 있으면 광주리에 그런 나물들을 담아서 마당 한가운데에 내놓곤 하셨다. 들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형제들끼리 서로 등목을 해주었다. 흠뻑 땀을 흘린 후에 찬물을 등에 끼얹고 난 후 수건으로 닦을 때의 그 느낌은 정말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독특한 시원함과 개운함이 있었다. 온 가족이 희미한 등불 하나를 켜놓고 마주 앉아서 함께 먹는 저녁 맛은 정말 맛이 있었다. 특히 엄마가 고추를 송송 썰어놓고 어린 호박 몇 개를 통째로 넣고 손수 끓여주신 된장찌개는 정말 꿀맛이었다.
어쩌다가 동네 어르신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셔서 막걸리 한 잔이라도 거나하게 드시고 흘러간 노래를 부르면 곧바로 마을 노래자랑으로 이어져서 여기저기서 동네 분들이 모여 들여 우리 집은 그야말로 잔칫집을 방불케 하였다. 농사를 짓는 동네 어르신들은 그렇게 노래와 술로 농사일의 시름을 달래고 다음 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논밭으로 나가셨다. 마을 입구에 우리 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은 어른들은 물론 내 또래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산과 들만 바라다보이는 첩첩산중 산골에서 재배할 수 있는 농작물은 고추와 벼농사가 전부였다. 6.25때도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깡촌에서 논밭 한 마지기 없이 살기 힘들었던 그 당시에 열아홉 살의 나이에 큰형님은 귀도 잘 들리지 않는 청각 장애임에도 불구하고 마흔에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며 집안을 이끌어 가려고 남의 논을 지었다. 온종일 손이 부르트고 허리가 끊어지도록 아픈 고통을 참으면서 오직 농사일에만 전념하셨던 형님의 깊은 속내도 모르고 매일 일만 시킨다며 형님을 원망하고 화장실 다녀온다면서 몰래 도망가서 친구들하고 놀다가 온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지난번 고향에 갔을 때 마을 한 모퉁이를 경운기를 몰고 들로 일하러 가시는 큰 형님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평생 농사일을 하느라고 햇볕에 붉게 그을린 피부와 배가 허리까지 닿을 정도로 깡마른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형님을 좀 편히 쉬게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가을걷이로 한창 일 고향의 풍경을 그려보면서 올 추석에는 그동안 형님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큰형님은 한참 부모님 밑에서 응석을 부리며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무거운 지게를 지시고 논밭으로 달음박질하셨고 7남매의 장남으로서 어린 동생들의 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셨다. 동네 사람들의 집에 전기가 고장 나면 금방 달려가서 고쳐주고 신발이나 장화가 헤어지면 때워 주고 가끔 술에 취하여 땅바닥에 누워 계신 어르신 분들을 등에 업어서 집에까지 모셔다드리는 등, 우리 동네 사람들의 ‘손과 발’ 이 되어 주신 형님이셨다. 비록 배우지는 못했고 가진 것은 없으며 귀까지 잘 안 들리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남을 돕고 베푸는 삶을 사셨기에 지금도 최소한 우리 동네 사람들은 형님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고 따르고 있다.
고향의 추석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며 서울로 돈 벌러 가신 형님 누님들이 “올 추석에는 어떤 선물을 사 오실까?” 하루하루 기다림 속의 흥분과 긴장 속에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우리 언니는 이번에 새 옷 사 왔다. 우리 형아는 과자를 엄청나게 많이 사 왔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온 동네에 자랑하고 돌아다니느라고 바빴고 “여러분, 마을 뒷산 공터에서 콩쿨 대회가 있으니 저녁 일찍 드시고 많이 참석해주세유.” 이장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지면 “이번 콩쿨 대회에는 누가 상을 탈까?” 기대하며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콩쿨 대회의 최우수 상품은 시계였고 낫, 곡괭이, 삽 같은 농기구가 대부분이었다.
꾀죄죄한 모습에 햇볕에 검붉게 그을렸던 형님도 충청도 사투리에 시골티가 났던 누님도 서울만 갔다 오시면 뽀얀 얼굴에 서울 말씨를 쓰는 세련된 모습으로 변신했다. ‘나도 어서 커서 형님, 누님들과 같이 돈 많이 벌어 멋진 모습으로 고향에 나타나야지.’라는 야무진 꿈도 꾸었다.
추석날은 윷놀이와 자치기를 하며 형님 누님이 사다 주신 새 옷을 입고 마치 패션쇼를 하는 모델과 같이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송편, 떡, 과일과 같은 음식과 동동주를 실컷 나눠 마시며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저녁때는 모두들 얼큰하게 취하여서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셨다. 그날만큼은 음식과 함께 듬뿍 정을 나누었다. 서로를 경계하며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고 살아가는 요즈음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올 추석 귀향길은 정말 교통체증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어릴 적 추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저마다 뭐가 그리 바쁜지 고향을 방문한 사람들도 얼굴이 낯선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번개같이 “획” 지나 가버리니 악수 한 번 하면서 담소를 나눌 기회도 없어 못내 아쉬웠다. 세월이 바뀌어 사람들의 사는 모습도 많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정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 온 가족이 화로 주변에 둘러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과연 언제 익을까?’
턱을 괴고 기다리면서 할머니께서 들려주셨던 호랑이 이야기는 왜 그리 무섭고 재미있었던지 어린 마음에 할머니께서 흉내 내시는 호랑이 음성과 제스처는 정말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에 집중을 하다 보면 어느새 고구마는 노오란 살색을 자랑하며 아주 맛좋게 푹 익어 있었다. 껍질을 하나씩 벗기기가 무섭게 어느새 고구마는 입속에 들어가 있었고 그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군고구마를 다 먹고 나면 입 주변이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8남매 형제들이 서로 먹겠다고 화로 주변에서 다툴라치면 “이놈들, 잠깐만 기다려봐라. 할머니가 잘 익은 것부터 꺼내 줄게.” 하시면서 뜨겁지도 않으신지 잘 익은 고구마를 하나씩 꺼내서 주셨다.
당시 우리 할머니는 동화 구연가이셨으며 요술쟁이셨다. 8남매의 막둥이란 이유로 잘 익은 맛있는 고구마는 늘 내 몫이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바로 위의 형님께서 “딱지 줄까? 구슬 줄까?” 하시며 내 고구마를 뺏어 먹으려고 딱지나 구슬로 유혹했다. 딱지나 구슬이 고구마보다는 더욱 매력적인 존재였기에 얼른 “그럼, 구슬 3개 줘” 하고 형님과 고구마와 구슬을 맞교환했다. 그러나 이 모습을 어머니께라도 들키면 “얘들아, 너희들 왜 막둥이 고구마 다 뺏어 먹었니?” 하시며 상황도 모르시고 늘 형님만 나무라셨다. 하여튼 어렸을 때는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온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 당시에는 고구마나 감자가 유일한 간식거리였다. 특히 고구마의 껍질을 벗겨내고 노오란 속살이 보일락 말랑할 때 “호호” 입김을 불면서 총각김치나 배추김치에 턱 걸쳐서 먹었던 군고구마의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고구마를 캐는데도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우선 고구마 줄기를 낫으로 걷어낸 후 마치 보물이라도 캐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고구마 줄기가 있는 주변의 흙을 파내야 한다. 천천히 고구마 줄기 주변의 흙을 파내다 보면 드디어 빠알간 고구마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막 캐낸 햇고구마를 깨끗이 씻은 후 큰 솥에 삶아서 먹으면 유독 더
달면서도 그 맛이 자연의 냄새를 흠뻑 느낄 수 있어 더욱 좋다. 지금같이 설탕이나 잼이 귀했던 시절, 고구마로 조청을 만들어 떡을 먹을 때 찍어 먹으면 떡과 조청의 맛이 함께 어우러져 정말 맛이 있었다.
우리 집은 큰 마당과 사립문이 있었다. 오징어 놀이, 사방치기, 자치기, 팽이치기 등 우리 집 마당은 동네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한두 명씩 아이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온종일 시끄럽게 뛰노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마라.”라며 크게 개의치 않으셨다. 네 살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어머니셨지만, 마음만은 늘 부자이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우리 집에 ‘마실’(충청도 사투리로 남의 집에 놀러 감을 이르는 말)
을 와서 담소를 나누거나 윷놀이를 하셨다. 그런 분 중에는 병수 형 어머니도 계셨다. 병수 형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병수 형 어머니는 몸이 아프셔서 병원에 계시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병수 형은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면서 농사일 거들어 주시는 날이 많았다. 형님은 어찌나 건강했던지 나보다 나이는 열 살 정도 많았지만 나를 번쩍 들기도 했고 쌀가마를 뒤 광으로 옮기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밥도 나보다 두 세배는 더 먹었고 덩치도 컸다. 7남매 대식구인데도 늘 친형제처럼 지냈다. 어느 추운 겨울, 첫눈이 우리 동네를 하얗게 수놓았다.
“원성아(당시 집에서 불렀던 내 이름)” 사립문 쪽에서 힘없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병수 형 어머니셨다. 지병이 있으셔서 몸이 야위셨고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아휴, 형님(어머니가 병수 형 어머니를 부르던 말) 오셨어요.” 아침을 드시다 말고 어머니는 부리나케 마당으로 뛰어나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요양원에 계시다가 우리 집으로 오셨던 모양이었다. 그해 겨울,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총각김치에 보리가 많이 들어간 밥이 전부였지만 따뜻한 정을 나누며 한겨울을 함께 했고 병수 형 어머니도 점점 병세가 회복되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인정만큼은 넉넉해서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지금은 어머니는 저 먼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나셨지만, 첫눈이 올 때면 까마득한 세월을 자식만을 위해 살아오신 우리
엄마와 지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병수 형님을 사랑과 정성으로 잘 키우셨던 병수형님 어머니가 생각난다.
이처럼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해보면 비록 못 먹고 못 살았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이 많았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을 정도로 이웃 간의 정이 두터웠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가족끼리는 서로 챙겨주고 보듬어주는 뜨거운 가족애가 있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고 모든 것이 편리한 요즈음 자살과 이혼가정이 늘어나며 여기저기서 암울한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가끔 어릴 적 행복했던 순간들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많이 있다. 오순도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았던 어린 시절처럼 모두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참 좋겠다.
아내는 목사님의 소개로 만났다. 당시 나는 헐렁헐렁한 새파란 청바지에 꽉 끼는 티셔츠를 입고, M자형 대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은 막 시골에서 올라온 삼돌이였다. 만난 횟수가 더해가면서 ‘내가 왜 진작 이러한 여자를 못 만났을까?’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우리는 다정한 연인이 되었다. 청송대에서의 모기 미팅, 달리는 버스 뒤에서의 영화 촬영(?) 등을 계기로 몇 달도 안 되어 결혼에 골인했다.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라고 하면 한 편의 소설을 써도 될 것 같다. 태어나자마자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녔고 민간요법도 써보았지만 큰 차도가 없었다. 밤새도록 울어대는 아이를 안고 찬송가, 군대, 흘러간 노래, 동요 등 안 불러본 노래가 없을 정도로 꼬박 밤을 새웠던 적도 많았고 메리야스만 입고 업어주면 등에 피가 잔뜩 묻어서 하루가 멀다고 옷을 자주 갈아입어야 했다. 첫째 아이를 키울 때도 공부한다고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아빠 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
“아빠, 영광이에 대한 기억나는 것 있어?” 아내의 질문에 “글쎄……”하며 장인 어르신은 한참을 생각하신 후에 “고 녀석이 내가 시골에서 포도 농사지을 때 막걸리 한잔 하고 취해서 풀밭에 누
워있을 때 ”할아버지, 얼른 일어나세요. 집에 가셔야지요.“ 라고 했었지. 내 손주지만 어렸을 때부터 참 착했어.”
장인 어르신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력에 감동했는지 신이 난 아내는 “그럼, 혹시 예찬이에 대한 기억도 있어?”라고 묻자 “걔가 누구더라.” 한참 생각하시다가 “있지,
한 번은 학교에서 집으로 길을 잃어서 어떤 트럭을 모는 아저씨가 집 근처 삼거리까지 데려다주었어.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참 그 양반 착하기도 하지. 만약 나쁜 맘 먹었으면 정말 큰 일 날 뻔하지 않았냐?”
장인 어르신의 대답은 늘 고정되어있다. 손주들이 모두 착하고 공부를 잘해서 이다음에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너무도 뻔한 대답을 말이다. 아마 장인 어르신의 간절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어느 날은 멀쩡한 정신으로 아주 구체적인 일까지 기억을 하시는데 대부분 기억을 못 하시거나 생리현상까지도 참지 못하고 그만 실례를 하는 바람에 요양보호사분께서 이만저만 고생이 아닌 것 같다. 당뇨, 고혈압, 갑상선, 식도암 등 종합병원을 앓고 계신 장인 어르신께서 이제는 설상가상으로 치매까지 걸려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난번 갔을 때는 온통 바지에 큰 것을 실례해놓아서 아내와 장모님께서 한바탕 큰일을 치르셨다. 치매에 걸리시기 전에도 아무 음식이든 잘 드시는 대식가였는데 이제는 눈앞에 보이는 대로 과자든 과일이든 모두 다 먹어치우는 수준에 이르렀다.
“엄마, 아빠 너무 드시는 것 아냐? 저 봐, 오늘 또 일을 냈잖아?”
아내의 잔소리에 장모님께서는 “내비둬라, 온종일 병원에 있는 양반이 이제는 먹는 재미까지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산다냐?”
워낙 성품이 좋으시고 인정 많으신 장모님이라 충분히 그러한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남편이 치매와 암, 당뇨로 사경을 헤매는데 몸에 안 좋다는 음식을 과식하도록 방치하시지는 않으실 텐데 이제는 먹는 즐거움마저 뺏을 수 없으니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야, 나 쉬 마렵다.”
아내에게는 서슴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만 사위는 어려운지 내게는 절대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법이 없다. 그럴 때면 아내는 “아빠, 그냥 편히 하세요.”라며 패드에 할 것을 권한다. 건강이 온전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실 때는 편지 한 장을 버릴 때도 가위로 잘게 잘라서 불태워서 버릴 만큼 철두철미하고 치밀하셨던 분이 갑작스레 딴사람이 되어버렸으니 너무 서글프고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이제는 대소변도 본인의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어 패드를 착용하고 침대에서 누워서 요양보호사의 도움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분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는 요양보호사분께서 “할아버지께 먹을 것 조금만 주세요. 너무 많이 드셔서 힘드네요.”라고 말씀하셨다. 어쩌다 한 번씩 병원을 방문하는 자식들보다 매일 간병을 하는 당사자로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러한 말씀을 하실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제는 아들 녀석까지 동반하고 갔더니 같은 병실에 계신 어르신께서 “할아버지 웃는 모습 처음 봐유. 얼마나 조커슈, 저렇게 손주들까지 오니……”
모처럼 장인 어르신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보고 “얘들아, 할아버지 웃는 모습 보았지? 앞으로 자주 오자.”라며 아들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신이 나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다.
앞으로 장인 어르신께서 살아계실 동안 한 번이라도 더 병원에 방문할 생각이다.
물론 평소에 좋아하시던 과자와 과일을 잔뜩 사서 말이다.
‘가족’이란 울타리가 있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이 힘든 순간순간을 참고 인내하며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기에 분주하게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