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싸움(교육)과 아버지의 노름
황 후 남
서울시 동대문구
부모님의 삶을 어떻게 쓸까를 망설이는 마음으로 그분을 대신하여 내가 감히 글을 써보려고 한다. 특히 엄마의 사랑과 희생을 글로써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마는 우선 엄마한테 내 작은 마음을 나눠볼까 해서 간단한 쪽지 편지라고나 할까..
- 엄마! 살아가는 길목에서 잠시 들어 보세요.
92년 동안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을 잘 마치고 예수 인도 하셨네를 외치며 천국으로 가실 준비하고 계심을 나는 믿습니다. 엄마가 살아오신 삶이 수고와 슬픔뿐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을 떠나신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나는 벌써 눈시울이 붉어오네요. 엄마와 아름다운 동행을 했던 것과 행복한 동거를 해오던 날들을 계수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수도 없이 엄마를 불러보고 또 불러 봅니다. 당연히 대답 없을 줄 알면서도 나는 엄마가 너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엄마를 큰언니한테 보내놓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글을 써서 지금 이 시간 이렇게 엄마 앞에 드립니다.
엄마! 그렇게 아플 때도 아무런 말 한마디 안 하고 먹을 것을 힘써 거절하면서 혼자 떠날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도 급하십니까요.
아프지 말고 좀 더 살아 주기를 얼마나 마음 졸이면서 기도했는데 그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고 아픈 몸으로 훌쩍 떠나가 버리셨네요. 엄마가 그렇게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던 우리 팔 남매를 보세요. 모두 살아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시고 마음에 담으세요.
우리 팔 남매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한없이 쏟아진다 할지라도 우리 엄마 살아오신 삶을 되살려보면 눈물이 폭포수가 된다 해도 그 넓고 깊은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아요. 엄마를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딸은 눈물을 흘리며 엄마 앞에 용서를 구해 봅니다.
평생 농사일하느라 손톱이 다 닳아 뭉그러지고 발가락이 비뚤어져 걸음을 잘못 걸어도 엄마는 그 아픈 것을 혼자 그렇게 마음으로 참고 견뎌내신 거 아닙니까.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셨어요, 자식을 팔 남매나 두셨으면서 꼭 그렇게 혼자 참기만 하는 것이 엄마였었나요.
나는 엄마가 안 아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정신을 차리고 엄마 아팠음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리네요. 엄마 얼굴 보러 더 많이 올 걸 하는 생각에 지나간 날들이 너무 아쉬워 소리 없이 애가 타는 마음으로 가슴을 때립니다.
엄마한테는 늘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이 엇갈리어서 때로는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엄마가 깊은 신음할 때에 위로해 드리지 못했으며 엄마가 힘들어할 때도 아무런 힘이 되어드리지 못했고 엄마가 도와 달라고 손을 폈을 때 내가 때로는 손을 움켜쥐였으며 엄마의 대우를 받고 싶어 했을 때도 나는 멸시한 적도 있었습니다. 엄마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늘 그러했듯이 사랑으로 덮으시고 또 덮으세요. 그런데 엄마 많이 보고 싶어요.
엄마는 몸이 다 닳고 성한 곳 하나 없이 자식을 위해 몸을 던져 일하시던 그 육신이 어느 때인가부터 아파서 신음할 때에도 나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 많은 날을 혼자 견디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우리 팔 남매를 키울 때 모두 배불리 먹이지 못해 마음 아파하든 그분이 바로 우리 엄마 위대한 그 이름 박란규입니다. 딸 다섯 중에 둘을 남의 집에 식모로 보내서라도 배불리 먹이기를 소원했던 우리 엄마, 그 딸을 보낼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습니까. 말 못했을 그 사연을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그 아픈 마음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엄마 그리고 또 하나 있어요. 엄마의 아들 중의 하나는 부잣집에 갔다가 그 집에 개가 쌀 누룽지 먹는 것을 보고 달려와서 ‘엄마 나는 저 집에 개가 되었으면 참 좋겠어. 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 마음이 어땠을까 아마도 그때 엄마 속이 곪아 터졌을 것 같은데 그때 그 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했던 내 엄마의 아픈 마음이 생각나서 지금 내 가슴에 애가 타는 눈물이 마음속에 깊이 깊이 고여 있습니다.
엄마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식들이 힘들어할까 봐 끝내 그 아픔을 혼자 참고 견디면서 죽음이라는 길을 가기로 작심하셨나요. 그러나 죽음의 복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셨다는 걸 내가 알고 있습니다. 개꼴 꼴짝에서 고생만 하다가 아파하던 우리 엄마 건강하게 더 사시면서 자식들한테 실컷 효도 받아도 될 것을……..
자녀들이 너무 힘들어할 즈음에 엄마는 천국으로 가시겠다는 것과 그동안 잘 살아오셨음을 나는 축하드립니다.
엄마! 천국 가시면 영원토록 더 좋은 곡조로 찬송할 수 있어요. 그곳에는 이런 멸시를 받지 않아도 되고 또한 걱정할 일이 없어요.
그 모든 수고가 있었기에 우리 팔 남매는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엄마를 기억하며 시마다 때마다 박수를 보내 드릴게요. 엄마는 홀로 우뚝 선 소나무처럼 늘 우리가 쉴 수 있도록 그늘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너무 고맙습니다.
또한, 어둡고 위험한 일이 있었을 때는 엄마가 피 터지게 막아 주었기에 우리 팔 남매는 이렇게 밝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멋진 우리 엄마, 엄마는 결단코 혼자가 아닙니다. 엄마를 지극히 사랑하시되 엄마 자신보다 더 엄마를 사랑하시는 엄마 하나님이 계시며 그리고 엄마를 등에 업고라도 천국까지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엄마 절대로 예수님을 놓치거나 잊어버리시면 안 돼요. 온몸이 깨어지고 아파서 견디기가 힘드셨을 우리 엄마, 이젠 그렇게 아플 일이 없는 천국에 가셔서 자유롭고 평안한 안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우리 엄마가 영원히 누려야 할 당연한 천국의 복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우리 엄마..
엄마의 죽음이 아름다운 천국의 등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신실한 발걸음을 힘있게 내디디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오신 날들을 이야기하고 마음껏 기뻐하시기를 두 무릎꿇고 머리 조아려 기도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엄마 사랑합니다. 엄마 존경합니다. 그리고 가장 닮고 싶은 분이 엄마였습니다.
지금은 엄마가 아파 스스로 일어날 수 없고 누워만 계시지만 일생 엄마가 보여준 희망의 싹을 틔우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우리들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엄마가 살아오신 삶을 교훈 삼아 잘 살아갈게요.
엄마도 죽고 나도 죽어 이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 주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하는 그 날까지 평안을 빌어봅니다. 엄마 계신 곳에 좋은 일이 있거든 꿈에라도 소식 전해 주세요. 한밤중에도 괜찮고 언제든지 아무 때나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우리 엄마 안녕입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셋째 딸이 드렸어요.
- 지금부터 엄마의 삶을 적어보려 한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첩첩산중 개꼴이라 불리는 동네에 몹시 가난하게 살아오신 두 분이 계셨다. 그분들이 바로 우리 부모님.
할머니는 아주 별난 분이셨으며 친정이 윤씨 가문에 양반이라고 자칭하셨고 할아버지는 아주 조용하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할아버지와 담배 농사일을 하고 계셨다. 그러던 중 할머니가 의성에 있는 만네라는 동네에 가셨다가 한 처녀(박란규)가 길을 가는 데 아주 얌전하고 참한 규수감이라는 걸 알고 며느리로 삼아야겠다고 작심을 하고는 그 처녀의 뒤를 쫓아가 그 집에 함께 들어가서 격식 없이 며느리로 삼겠다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박씨 문중에 장손의 집안이며 아주 법도가 엄격하기로 동네가 다 알고 있는데 우리 딸은 다른 선비 댁에 혼삿말이 있다고 거절을 했지만, 세상에서 윤씨 가문이 제일 큰 양반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할머니께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증조 외할아버지는 손녀를 황씨의 가문에 출가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 가문을 더럽힐 수 없다는 마음과 우리 문중에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 때문에 결국은 병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외갓집에 가서 강제로 데리고 갈 것이며 온 동네 다니면서 소문을 내겠다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대항도 해보고 울어도 보고 애가 타는 마음을 시어른께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결국에는 할머니가 총각인 아버지를 데리고 함께 외갓집으로 가서 터무니없는 협박과 가당치도 않은 말을 했기 때문에 박씨 가문에서는 통곡할 일이었다. 나날이 심해져 가는 할머니의 횡포와 딸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외할머니는 딸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자고 증조할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마음 아프지만, 딸을 주겠다고
승낙하고 말았다. 열다섯 살에 시집오던 날 개꼴 골짝의 길이 얼마나 좁은지 길가에 온통 풀들이 가득하여 가마를 타고 들어가는데 너무 흔들려 엄마는 어린 마음에 떨어질 것 같아서 결국에 엄마는 가마에서 내려 한복을 이리저리 치켜들고 태어나 처음으로 십오 리나 되는 험한 산골길을 걸어서 시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어둑어둑해졌는데 호롱불을 켜둔 채 격식도 없는 혼례를 치르고 방이라고 들어가니 할머니가 아빠와 엄마 사이에 누워서 함께 하룻밤을 지내고 새벽에 일어났는데 앞뒤 옆을 보아도 모두가 산이었고 너무 무서워서 밤에 자다가 화장실도 못 가고 참기만 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엄마의 화려한 시집살이를 살펴볼까 하는데 엄마의 일생이 너무 안쓰럽다는 마음이 든다. 아침에 할머니는 밥을 하라고 뒤주에서 보리쌀 조금 꺼내주셨다. 큰솥에 나무를 때서 밥은 했는데 반찬은 된장과 소금이 전부였다. 다섯 식구는 그렇게 아침밥을 때우고 삼촌과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나무하러 산으로 가시고 난 뒤에 할머니는 집에서 글을 읽으시다가 빨래를 하라고 하셨다. 무명이불과 무명 옷으로 꼭 삶아야 한다고 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냇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방망이를 두들겨가며 따뜻한 물을 한 바가지 갖다놓고 손을 녹여 가며 빨래를 끝내고 빨래를 보자기에 담아 머리에 이고 와서 줄에 널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나오시더니 깨끗하게 빨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불빨래를 마당에다가 모두 펼쳐서 던져 놓고는 다시 빨아 오라고 하셨다. 철없는 우리 엄마는 문중에서 배운 모든 것이 하나도 실천해볼 것이 없고 또 필요로 하지 않다는 걸 알고 생각할수록 슬프기만 했다. 때로는 밥을 다해놓았는데 할머니는 정지에 오시더니 아궁이에서 재를 한 움큼 쥐고 밥솥 뚜껑을 열고 얹어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며느리 삼겠다고 쫓아다니시더니 결국 이렇게 하시려고 그렇게도 힘들게 엄마를 데리고 오셨는지.. 할머니 왜 그리하셨나요.
할머니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참 멋진 인생이라고 자랑하겠지만, 우리 엄마가 살아보겠다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이런 중에도 엄마는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네. 그 어린 나이에 이 어찌 된 일인가. 그냥 도망가버리지 못하고 고생만 하고 살아가야 하는 걸 왜 몰랐을까. 내가 볼 때는 고생할 것이 뻔 한데 말이야.
그런 며느리를 보는 할아버지는 늘 엄마가 안쓰러워 밥을 먹을 때도 국에 있는 국물만 잡수시고는 건더기는 엄마 먹으라고 남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남겨 놓으신 국건더기는 아이들이 많아 엄마한테는 아무것도 없고 빈 국그릇만 있을 뿐이다. 철없는 어린아이들은 엄마를 생각하고 있을 마음도 없고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이 있으면 언니가 못 먹게 때려도 맞으면서 밥숟가락은 입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그 어린 마음이지만 아무리 맞아도 먹을 것만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인정 많으신 우리 할아버지는 그 옛날에도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셨으며 할머니는 밥그릇에 십자가를 그려놓고 두 손 모아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셨으며 아침마다 물가에 가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는 우리 호락(삼촌)이를 여든여든 두 여든에 점지해주시라고 두 손 모아 하늘의 일월성신께 기도하곤 하셨다.
드디어 엄마는 대를 잇는다는 아들을 낳아서 잘 크고 있었는데 4개월이 지난 후에 그 어느 날 아이에게 열이 많이 났다고 한다. 엄마가 정지에서 아침밥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방에서 원어마 이리 잠깐 들어오너라 해서 엄마가 들어갔더니 너는 놀라지 말라 하시고는 아이를 안고 계시다가 대원이가 죽었다 라고 힘없이 말씀하시면서 엄마한테 이 아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보라고 건네주셨는데 너무 갑작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죽은 아이를 대충 싸서 큰골 막바지에 갔다가 묻어 놓고 오겠다고 하시면서 아이를 안고 총총걸음으로 산속으로 들어가신 후에 엄마는 아이가 떠나간 곳을 바라보다가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할머니가 오시더니 큰소리로 화가 나서 핏덩어리 하나 없어졌는데 뭘 그렇게 울고 있어? 라고 꾸중을 하시면서 들어가서 밥을 해야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하면서 재촉을 했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 그 아이를 보낸 이야기를 할 때는 엄마가 늘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고 함께 느껴진다. 그런데 연이어 딸을 셋 낳고 난 후에는 할머니가 엄마를 더 힘들게 했다고 한다. 세 번째 딸을 낳고 난 후에는 엄마한테 욕을 하면서 이년아 눈이 열 다발이나 빠져 뒈질 년이라던가 정말로 입에 담지 못하는 욕을 아주 심하게 하셨다.
그렇지만 엄마는 양반집에서 교육받은 참한 사람이라 혼자 속으로 참고 견디면서 우리 팔 남매를 멋지게 키워냈다. 아버지를 새장가 보내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하면서 엄마한테는 너무 인색하시고 함부로 대하는 우리 할머니는 아무도 간섭할 사람이 없다. 할아버지도 맨 날 할머니한테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고 지고 사신다. 이럴 때도 아버지는 노름했기에 할아버지와 엄마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 놓으면 아버지가 노름하면서 빚을 졌기에 노름빚 받으려 사람들이 와서 온 집안을 다 뒤지고 할아버지한테 행패를 부릴 때 엄마는 내년에 씨할것은 두고 가라고 했지만, 빚쟁이는 아주 냉정하게 홀랑 다 가지고 가버렸다고 했다. 이때 할아버지는 빚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사정했고 곡식을 다 가지고 가지 말아 달라고 매달려 보기도 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빚으로 다 털리고 우리는 꿀밤을 주워 와서 묵을 끓여 먹기도 하고 봄이 되면 새벽부터 산에 가서 산나물을 한데레끼해서 허리에 차고 오면 배가 고파서 엄마는 쓰러질 것 같지만, 엄마라서 참고 또 참는다. 나물을 삶고 보리쌀 약간 섞어서 죽을 끓이고 있지만 기다리는 어린것들은 계속 먹을 것을 달라고 칭얼거린다. 소나무에서 송기를 벗겨 껍질로도 죽을 끓여 먹기도 하고 방앗간에 가서 보리 쌀겨를 가져와서 채로 치면 고운 가루가 나온다.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할아버지는 어려운 세상살이를 살아 보려고 땅을 치고 울면서 아버지한테 노름에서 손을 떼고 정신 차리라고 통곡을 할 때 아버지는 이젠 노름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이면서 작두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잘라버리겠다고 하시더니 뼈는 자르지 않고 살만 잘라서 피가 났으며 우리는 아버지가 손을 자르겠다고 작두 곁으로 갔을 때 몹시 무서워서 큰 소리로 울기도 했다.
내가 비록 어렸지만, 이 순간만큼은 구박받는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 마음은 잠시였다. 늘 집안은 싸움과 배고픔과 무서움이 감도는 삶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친 손가락을 붕대로 감고 그다음 날 새벽에 보니 어른들 몇 사람이 바위굴에 들어 앉아서 손가락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그 손으로 노름을 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정말로 노름이 이렇게 좋은 것일까 나는 엄마한테 와서 고자질했고 우리 집은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래도 놓을 수 없는 아버지가 노름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노름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또 그 길을 가고 있는 건지 그래서 나는 그런 아버지가 아주 무섭고 싫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많이 피우셨다. 하루에 4갑 정도. 우리가 어렸을 때는 담배 농사를 짓기 때문에 담뱃잎을 종이에 돌돌 말아서 피우셨는데 그 종이는 할아버지가 교회 다니셨기에 성경책을 한 장씩 뜯어서 담배를 피우셨다 그 종이가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워 잎담배를 싸서 피우면 아주 좋다고 하시기에 나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멋지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
그런데 엄마는 줄지어 딸을 셋을 낳았고 그 셋째가 바로 나다. 내 동생은 아들 넷 딸 둘인데 그중에 아들(종원) 하나가 또 죽었다. 그 아이는 너무 많이 아파서 동네 할머니가 도랑에서 가재를 잡아와서 끓여 먹이라고 했는데 나는 동생이 아프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에 가재를 많이 잡아와서 펄펄 끓여서 그 국물을 아주 많이 먹였다. 그걸 먹고 난 후에는 그 아이가 열이 너무 심해서 용하다는 다른 마을 할머니한테 업고 가는 중에 엄마 등에서 영원히 오지 못하는 천국으로 가버렸다.
엄마는 도랑을 건너오다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면서 손으로 땅을 짚었는데 손목이 뚝 부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엄마는 그 다친 손 때문에 밤에 잠을 잘 못 잤고 우리가 알면 마음 아플까 봐 계속 말로는 안 아프다고 하면서 억지로 아픔을 참고 이불 속에서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그때 덜렁거리는 손목을 급히 붙이느라 부러진 뼈가 잘못 붙었기에 한쪽으로 치우쳐 뼈가 겉으로 툭 튀어져 나온 채로 완치가 되었다. 자식이 아플 때는 업고 뛰어가면서 고쳐보겠다고 하더니 엄마 몸이 으스러져도 병원에 가지 않고 그렇게 아픔을 견디면서 우리를 키우셨다니 이것이 웬 복이며 은혜인가. 자식이 객지에 나가 공부를 할 때는 농산물을 뭉치뭉치 싸서 한 보따리를 만들어서 머리에 이고 등 넘고, 산 너머, 물 건너 그 자식과 짐 보따리를 시외버스에 실어놓고는 자식과 같이 가던 길을 혼자 돌아가서 자식한테 연락 오기를 나날이 기다리는 엄마. 그때는 전화도 없고 연락할 길은 오직 도착해서 잘 왔다는 편지 하나가 올 때까지는 애태우며 기다려야만 했던 우리 엄마 ……..
이렇게 힘이 들 때도 우리 아버지는 노름하였고 집에 오면 마당 쓸지 않았다고 회초리로 때리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변소에 있다가도 아버지가 부르면 벌떡 일어나서 뛰어와야 하는데 좀 늦으면 맞았다. 어린 마음에 나는 우리 집이 싫었고 동네가 창피해서 사람들 앞을 지날 때는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면소인지 도청인지 사람들이 와서 엄마한테 효부상을 주겠다고 형편을 확인하려 누군가가 왔을 때 엄마는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당연한데 내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가당찮다고 하면서 받을 수 없다는 칼 같은 말로 단호하게 거절을 하셨다.
이렇게 살아오신 엄마 앞에 우리 팔 남매는 머리가 스스로 숙어지고 겸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가 노름하는 아버지를 돌이킬 방법이 없고 집에 먹을 것이 없으니 쫄쫄 굶고 있는 시어른과 자식들을 바라보니 너무 힘들어 언덕에 떨어져 죽으면 남편이 노름을 끝낼까 하고 산 중턱쯤 갔을 때 할아버지가 뒤따라오면서 야 원어마 나 좀 봐라 너가 가면 나는 죽는다 야야 가지 마라 이 아이들이 있는데 어딜 가냐 나를 봐서 가지 마라 하는 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뒤를 힘없이 따라와서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겠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시어른과 자식에 대한 사랑과 희생이 있기에 또 살아보기로 다짐했겠지. 담배 농사를 하는 엄마는 낮에는 담배 나무에서 잎사귀를 뜯고 한밤에는 담배를 짚으로 꼬아 만든 줄로 하나씩 엮어야 한다.
엄마가 졸지 않고 정신이 있을 때는 담배를 잘 엮고 있는데 잠이 와서 졸면서 엮을 때는 이때까지 엮어두었던 것을 모두 다 하나하나 빼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엄마가 담배 엮는 것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엄마의 수고가 마음에 걸리고 우리 자식들은 손을 더 빨리 놀려서 끝내려고 힘껏 돕지만, 어린것들이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일을 끝내면 동네 사람들은 다 조용히 잠들었고 우리 식구들은 일에 묻혀 사는 것이 전부이며 오직 일뿐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엄마는 우리를 공부시키겠다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남들보다 늦게 잠들었고, 길을 걸어가면서 졸고 있던 우리 엄마는 고픈 배를 움켜잡고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나물 뜯어 죽을 끓이고 남들보다 백배 고생을 하면서도 얻어먹는 사람이 오면 없는 옷이지만 우리 것을 나눠주면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는 바로 산 교육자였다.
그 옛날에 엄마가 부르던 노래는(연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가 폴폴 나고요 오 이내 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김도 안 난다)..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엄마랑 함께 불러보기도 한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고등학교에 가려면 도시로 나가야 했다. 엄마는 아버지와 싸워서 나를 서울에 있는 언니한테로 보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들여보내려고 언니들과 편지를 주고받더니 결국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도 엄마랑 아버지는 싸웠다. 아버지는 가시나들은 공부시키면 안 된다고 큰소리치고 불호령을 했지만, 엄마는 내가 방티장사를 해서라도 아이들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두 사람은 맞서서 싸우고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방구석에 앉아 있었지만, 엄마는 여자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싸웠다. 배워야 하는 이유는 사람답게 살기 위한 것이며 예를 들자면 도둑이 집에 와서 다 훔쳐가도 머리에 들어있는 지식은 훔쳐갈 수 없으니까 머리에 든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엄마 생각이 맞는 것 같고 아버지랑 싸웠지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기뻤다.
엄마는 내가 서울 가던 날 신신부탁을 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과 남의 것을 탐내지 말고 가지고 싶으면 열심히 해서 정당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라 그런 말을 명심하고 나는 내일이면 가야 하는데 절대로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그래도 가야 한다.
서울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전차 다니는 것도 겁이 날 때 엄마는 왜 나를 이렇게 위험한 곳에 보냈을까 하고 의문이 생긴다. 어느 날 처음으로 외삼촌 집에 갔는데 변소에 가야겠기에 외숙모한테 물어보니 집 안에 있는 화장실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이런 화장실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와 보았기에 어리둥절해서 어디에다가 변을 보아야 하는지를 몰랐다. 도대체 알 길이 없다. 그때 변기를 보니 아주 깨끗한 물이 담겨있고 세면기에는 안 될 것 같고 욕조는 볼일 보면 더욱 안 될 것 같고 아무리 찾아봐도 대변 볼 때가 없기에 나는 급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수도꼭지 밑에 보니 하수구가 있었다. 그 순간 아 여기에서 보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고 난 후에 대변을 손으로 부숴서 하수구 구멍으로 밀어 넣고 물을 틀어 변을 내보내면서 아니 서울 사람들은 애 이렇게 화장실을 사용할까 도대체 변은 어떻게 하는 걸까 혼자 의문을 가졌지만 나는 외삼촌과 숙모한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나중에 변기 쓰는 방법을 알고 난후에는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무한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촌년을 엄마는 교육시키겠다고 사람답게 살라고 배움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었다. 이 세상에 엄마들이 칠억 만 명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엄마같이 위대하신 분은 한 사람도 없을 거로 생각한다.
내가 결혼할 때쯤에 아버지는 노름에서 손을 떼시고 확실하게 헤어나셨다. 아버지는 지난날들을 깊이 있게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계시는 내 아버지야말로 정말 멋진 분이셨다. 결단력은 좀 부족했지만 늦게나마 노름에서 손을 떼고 나서는 농사일도 열심히 하고 보이지 않게 잔잔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위치를 회복하셨기에 나는 더 좋은 딸이 되도록 노력하고 항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존경하리라 다짐했다. 엄마가 내 엄마인 것과 아버지가 내 아버지임을 오늘도 감사하고 그 부모님이 보여주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내신 것들이 어찌 그리 좋은지요. 아름다운 것들을 내 마음에 품고 살아가려 한다. 그 어느 날 아버지 팔순 때 짧은 글을 썼는데 그것을 내가 적어 보기로 한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팔순을 맞이하여 우선 팔십년 동안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팔십년 동안 그 많은 풍파를 겪으시면서 살아오시느라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우리 팔 남매는 오늘 아버지께 감사의 마음으로 큰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이 우주 공간에 단 한 분뿐이 안 계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라는 이름만 생각해도 보고 싶었을 때가 있었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이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지켜봐 주시고 기다려주신 우리 아버지 자식들이 때로는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적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아버지의 마음속에 사랑으로 변했지요. 그 많은 날을 참느라고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염치없지만 시마다 때마다 감사드리며 사랑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아무런 값도 치르지 못한 채 나 스스로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버릇없이 살아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버지! 6.25전쟁과 보릿고개라는 이름으로 인해 배고픔으로 아주 힘들었지만, 그때에도 자식 하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같이 키워서 막내까지 짝지어 주신 우리 아버지 감사할 일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글로 적으려면 감사와 후회되는 일들이 끝이 없지요. 우리는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면서 나 하나 살아가는 데만 바빴기에 아버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고마우신 아버지 널리 용서하시고 이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변함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십시오.
아버지! 자식들 때문에 행여나 섭섭한 마음이 있으면 이 시간 이후로 다 털어버리시고 남은 생애를 오직 기도와 간구로 좋으신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를 많이 공경하고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넉넉한 마음으로 예수 안에서 순종을 배우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소원이 있다면 예수 잘 믿으십시오.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며 참 평안의 길입니다. 사시는 날까지 평안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 집에서 맛있게 잡수시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우리 팔 남매에게 마음껏 축복해주십시오.
생명 끊어지는 날까지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셋째 딸 드림.’
- 죽음의 길로 홀연히 떠나가신 아버지
팔 남매를 둔 아버지는 92세이며 뇌경색 2급으로 불편한 몸이시며 대, 소변을 가리지 못하시고 엄마는 치매 3급으로 두 분이 함께 충남 계룡에 있는 요양원에 계셨다. 나는 이런 부모님을 집에서 모셔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정년퇴직을 하고 난 후에 어떻게 하면 내가 부모님을 모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편한테 먼저 부모님을 모시자고 했을 때, 흔쾌히 함께 노력하자고 하는 말이 나에겐 참 신나는 대답이었다. 우리는 팔 남매가 되기 때문에 모두의 허락 아니면 동의를 구하는 일이 그리 쉽진 않을 것 같아서 우선 대전에 있는 세 명의 아들들과 올케를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갔다. 나는 아들들과 차근차근 설득하는 마음으로 왜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지를 털어놓고 진지하고 신중하게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아들들 내
외는 누나가 모시면 안 된다고 말을 했다. 그 이유는 누워 계신 아버지와 정신없는 엄마를 누나가 모신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면서 요양원에 그냥 계시게 하자고 했지만 나는 끝내 내가 모실 기회를 한 번만 준다면 잘해보겠다고 몇 번이고 말을 했고 또한 부족한 건 서로 채우고 협력하자고 했다. 내게도 부모님을 모실 기회가 있다는 건 특별한 복이라 생각하면서 간청했기에 마침내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런 분들을 부족한 내가 모시기엔 사실은 아깝다. 얼마나 소중한 분들인지 전쟁과 보릿고개라는 힘든 날들을 지내는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고 기저귀 갈아가며 키워 주신 걸 생각하면 부모님의 똥오줌 갈아줄 기회를 내 어찌 놓칠 수 있으리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집에 오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본인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남의 손에 의탁해야만 생활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그래도 부모님은 자식이 힘들까 봐 요양원이 좋다고 했지만, 식욕이 왕성하신 아버지는 늘 배가 고프다고 말씀을 하셨다. 이런 말을 들을 때는 내 마음이 죄스럽고 안쓰러워 빨리 모셨으면 하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났다. 내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건만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주는 밥이 너무 적아서 엄마가 들어오면 먹을 것을 가지고 올까 봐 엄마 손만 바라보셨다고 한다. 엄마는 밥반찬으로 구운 김이 나오면 먹지 않고 휴지에 싸 들고 방에 와서 김을 뚤뚤 말아 아버지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드시게 했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내 가슴을 적셨다.
구운 김이 나오는 날은 아버지 입에 넣기 위해 엄마는 한 번도 먹지 못했는데 이젠 그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셨다. 김 싸 나르다가 들켰기 때문에 엄마는 김을 먹을 때 아버지 생각에 잘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또 애타는 마음으로 눈물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나는 먹을 것을 실컷 드리겠다는 마음에 너무 기뻐서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하나님! 내 집에 부모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감사했다.
부모님 모시러 토요일 날 아침 일찍 서울에서 여동생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내려갔다. 아버지와 엄마가 차를 타고 편히 올 수 있도록 방석과 쿠션을 준비하고 차 안에서 드실 간식도 준비했다. 요양원에 도착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우리 집에 가셔서 재미있게 함께 살자고 말씀드렸다.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엄마는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편한데 왜 딸한테 가느냐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을 하셨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서글픈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월요일에 큰언니랑 함께 대전에 내려가서 부모님을 모셔오기 위한 작전을 꾸미고 두 분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 토요일 부모님이 우리 집에 안 오신다면 어찌할까 하는 두려움 마음도 있었지만, 여동생과 함께 요양원에 도착했고 좋은 기분으로 부모님을 만나서 모시고 요양원을 나올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우리 집에 도착하면 바로 드셔야 할 곰국과 반찬을 준비해두었기에 우리는 피곤한 몸이지만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돌”만 빼고 모든 것이 다 맛있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이 내 집에서 나와 함께 삶을 같이한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아버지를 위하여 환자용 침대를 임대하고 아버지 방을 정해두면 자녀들이 방에 들어가야만 볼 수 있지만, 거실 중앙에 침대를 놓고 오가는 자녀들을 아무 때나 다 볼 수 있도록 설치했다. 아버지는 뇌경색을 앓고 계시는 동안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모두 어린아이와 같아서 많이 외로워하시거나 아니면 같이 있어 주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버지의 좋은 친구가 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친구가 되면 편하게 말을 할 때도 또한 대소변 갈 때도 식사를 할 때도 모든 것이 아주 좋을 듯싶어서 나는 급히 서로 친구가 되는 각서를 만들고 엄마를 증인 삼아 아버지와 나는 다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말을 때론 편하게, 때론 질서없고 웃고 떠들면서 엄마에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나에게 털어놓곤 하셨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서 기뻐하시면 엄마도 함께 좋아하고 나랑 친구가 되어서 잘 지내는 걸 보고는 아주 흡족해하신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친구를 했더니 목욕할 때도 어색하지 않고 우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가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걸 보고 있으니 내가 우리 집에 모셔온 것을 보람 있게 생각하고 날마다 힘은 들지만 때로는 너무 좋다는 걸 느낀다.
아버지가 때로는 하체에 손을 넣어 대변을 주무를 때도 있고 벽이나 침대 주위에 있는 물건에 문지르고 계실 때도 있어서 나는 손 소독제로 씻기도 하고 식초로 닦기도 하면서 주위를 청결하고 편하게 해주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운지 아버지는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가 말한다.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하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면 또 아무일 없었다는 듯 좋아한다.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앞으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나라도 더 잘 해주고 싶다. 그리고 또 있다. 대소변을 자주 하시기 때문에 목욕은 하루에 서너 번을 해야 하는 때도 있고 항상 먹을 것을 달라 하시는 우리 아버지, 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열심히 하는 가운데 생각했다.
옛날에 이런 말이 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실감 난다.
처음에는 최고로 모시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세 시간마다 마음을 다잡아 먹으면서 최선을 다했다.
잘 계시던 어느 날 점심 식사 때 조금 드시다가 먹기 싫다고 음식을 처음으로 거절하셨다. 오후 3시쯤 깊은숨을 몰아쉬고 아주 불안해하시는 것을 느꼈다. 내가 옆에만 앉으면 나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고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셨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냐고 물어보니 불안하다고 하셨고. 그래서 기도할까요 했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도를 하고 난 뒤에도 계속 숨을 깊이 있게 또한 가슴이 벌떡거릴 정도로 크게 움직였다. 그래서 찬송가를 불러 달라 하시는데 그 많은 찬송가 중에서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후에 나는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 하셨네”와 “내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두 곡을 불러드렸는데도 불안해하셨다. 나는 급히 큰 언니와 장남에게 전화해서 병원에 모실 것을 상의하고 왜 이렇게 숨을 쉬고 계시는지 나는 이런 모습을 생전 처음 보았기에 얼마나 힘드실까를 생각하고 119를 불렀고 경희의료원 응급실에도 전화했다. 아버지 시중을 들고 있는데도 왠지 자꾸만 내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편을 불렀고 아버지는 계속 찬물을 요구하셨는데 빨대로 물을 빨아올리지를 못하셨고 숟가락으로 떠드리면 잘 넘기셨다. 남편이 도착해서 조금 있다가 아버지는 크게 한번 천천히 숨을 내쉬고는 주무셨다. 그때 119가 도착했는데 그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셨다. 나는 지금 막 잠이 드셨으니 조금만 주무시고 병원으로 모시기를 요구했지만 오신 분들은 돌아가신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하셨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나는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하면 꼭 살아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역시 병원에서도 운명하심이 확실하다. 아니 어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갈 수 있을까? 어제도 괜찮았는데 나는 정신을 차리고 팔 남매 모두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고는 주저앉아버렸다. 이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죽는다는 것이 이렇게 쉽게 숨이 멈춘다면 정말 반복도 없고 연습도 없는 생명, 알뜰히 잘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일평생 살면서 그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바라본다는 건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임종을 지키면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건 기적이라 생각하고 싶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자녀들을 힘들게 하지 않고 그 아픔을 혼자 견디면서 죽음의 길을 가셨다 끝.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을 수 있도록 효자와 효녀를 만들어 놓고 그렇게 홀연히 그 길로 떠나셨다. 3남 5녀 중 큰언니는 육십이 넘어 사회 복지사 자격증을 받아 사업장에서 어르신들을 돌보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엄마를 생각했다. 내 엄마를 내가 섬기리라 작심한 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엄마와 생활하기로 했다. 우리 엄마는 굶어도 배워야 한다는 신념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았고 혀는 칼이다 라고 하면서 말을 할 때는 입안에서 열 번을 말하고 한번 밖으로 뱉으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 훈련이 잘 안 된다. 참 좋은 우리 엄마는 지금 92세이며 치매 3급이고 고관절 뼈가 부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계시지만,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우리 큰언니가 71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효심을 아끼지 않고 붓고 그 위에 또 부어 드리면서 효행을 실행하고 있다. 큰언니는 엄마 모시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면서 때로는 은근히 큰 형부를 칭찬해보기도 하면서 감사한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그 무엇보다 엄마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복 중에 복이라 늘 말을 한다. 옆에서 보고 있는 우리는 큰언니한테 배울 것이 많고 팔 남매 모두는 서로서로 엄마를 아끼며 육십 여섯 살 된 셋째 딸은 엄마 앞에 가면 철없는 아이처럼 먹바우 춤을 추고 난리가 난다. 이런 모습을 남이 보면 당연히 흉을 보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위아래가 없이 웃음을 선물하고 격려의 등을 서로 두들겨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엄마와 삶을 나눈다. 큰언니가 늘 하는 말 엄마는 나의 축복이라 선포하면서 오늘도 언니는 엄마를 옆에 모시고 있으면서 그 많은 날을 힘들게 살아오신 엄마의 흔적을 추억하면서 오늘 또 내일도 하루하루를 멋지게 살아낼 것이다.
** 아들 - 태원, 광원, 국원 ** 딸 - 점갑, 금조, 후남, 금순, 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