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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명칭의 최초 사용 시기는? 2016.06.24
우리 국기가 태극기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태극기에 관한 이런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서 요즈음 근거 혹은 출처가 모호한 정보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널리 유포되고 있다. 우선 책과 언론에 나타나는 두 가지 사례를 보기로 하자.컬린이라는 인물 2016.06.16
20세기 이전에 서양에서 발간된 우리나라와 관련된 단행본중 앞표지가 제목·저자 등에 관한 표기 없이 태극기 디자인으로만 장식된 기이한 책이 꼭 2권 있다. 하나는 앞서 소개한 알렌의 『대죠션』(Korean Tales, 1889)이며, 또 하나는 『조선의 게임-중국과 일본의 게임에 관한 주석(註釋)과 함께』(Korean Games with Notes on the Corresponding Games of China and Japan, 1895)라는 책이다.최초로 고종을 사진 촬영한 로웰 2016.06.10
로웰은 한겨울에 여행하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국왕을 비롯한 조선인들의 환대에 만족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최초로 고종을 사진 촬영하는 행운을 얻었고, 다수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412쪽 분량의 『조선』에는 스물다섯 장의 희귀한 사진이 각기 전면(Full Page) 크기로 실려 있고, 목판화 열세 점과 지도 두 점도 포함돼 있다.『계림팔도물어』의 태극기 2016.06.02
『계림팔도물어』 표지의 태극기 디자인은 단순히 문양이라고 하더라도 보기에 거북하다.안중근 장군과 베버의 '대한만세' 2016.05.26
"어릴적부터 대담한 용기를 지녔던 안도마(장군의 세례명)는 이토를 살해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 한국인이 아직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자랑스러운 안씨 문중의 자랑스러운 후예였다. 조국애와 침략자에 항거하지 않는 민족과 썩어빠진 양반의 무기력에 대해서 경종을 울렸다. 그는 이토를 처단하고 '대한만세!'를 외쳤으며, 조국을 위해 죽음을 택했다."의병과 적십자기 2016.05.19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해산은 1907년 형식적으로는 종료됐으나, 실질적으로는 해산된 것이 아니었다. 극소수 매국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과 장병들은 주권을 되찾으려고 절치부심했기 때문이다. 의병은 바로 이런 염원을 대변하는 우리 민족의 실질적인 군대였다. 『대한제국의 비극』은 그들에 관한 더없이 소중한 정보와 사진을 제공하고 있다.대한제국의 비극과 태극기의 운명 2016.05.13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몰아낸 일제는 한반도의 식민지화 정책을 노골화했다. 이런 중책(?)을 자임하고 나선 자가 이토 히로부미다.게일의 태극기 2016.05.04
국내에 알려진 게일의 업적보다는 그간 도외시됐던 게일과 태극기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알렌·아펜젤러·언더우드 등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서 태극기를 활용했듯이 게일도 마찬가지다. 또한 저서의 표지를 태극기로 장식한 것도 그렇다. 그러나 책의 본문에 태극기 사진을 실은 것은 게일뿐이다.애국가 악보의 태극기와 무궁화 문양 2016.04.28
표지가 태극기와 무궁화 문양으로 디자인된 애국가 악보는 국가 상징 연구에도 중요하다.독립신문과 독립문의 태극기 2016.04.21
1896년 4월 7일 창간 되었을 때 독립신문의 명칭은 '독닙신문'이었고, 제호(題號)에 태극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