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간흉(奸凶; 간사하고 흉악한 자)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는 등 한반도 식민지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공개적으로 일제를 규탄했던 두 명의 영국언론인이 있었다. 한 분은 앞서 언급한 데일리 메일의 맥켄지 특파원이고, 또 한 분은 그보다 세 살 아래이며 배설(裵說)이라는 한글 이름을 가질 정도로 우리나라를 사랑했던 인물이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우주를 품은 태극기』
우리 정부는 2014년 맥켄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반면, 배설에게는 1968년에 이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대통령장은 독립장보다 한 단계 등급이 높으며, 배설은 서구인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건국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참고로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5등급으로 나뉜다.
△배설(맥켄지 촬영) ⓒ『우주를 품은 태극기』
배설의 본명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이다. 그는 1904년 영국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파원으로 러일 전쟁 취재를 위해 방한했다. 열여섯 살부터 서른두 살이던 1904년까지 일본에서 무역업을 하다가, 그 해 3월 10일 언론인 신분으로 방한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에 우호적인 기사를 종용하는 본사의 방침에 항의해 한 달 만에 사직하고, 우국지사 양기탁(梁起鐸, 1871~1938)과 함께 1904년 7월 18일 한·영 이주언어 신문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배설, 총무 겸 주필은 양기탁이었다.
△배설이 애용했던 태극기(등록문화재 제483호) ⓒ『우주를 품은 태극기』
같은 시기에 방한했던 맥켄지가 1905년 귀국했다가 이듬해 다시 방한했던 것과 달리, 배설은 계속 체류하며 대한제국을 위해 의로운 투쟁을 벌였다. 의로운 투쟁? 그렇다. 총칼이 아니라 펜으로 싸운 것이다. 그는 신문사에 태극기와 영국기를 게양하여 치외법권 지역임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강력히 규탄하거나 항일투쟁을 고취시키는 기사로 한국인의 울분을 대변했다.
1907년 7월 일제는 신문지법(新聞紙法)을 만들어 우리 언론을 검열탄압함으로써, 배설이 운영하는 신문을 제외하고는 민의를 대변할 수 있는 신문이 없었다. 1908년 4월에는 신문지법이 개정되어 외국신문의 국내 반입조차 금지되고, 배설의 신문마저도 위태롭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