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후 조선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추락하고 일본의 위세가 거세지자, 러시아가 야심을 드러냈다. 조선 정부는 점차 친러시아적인 색채가 강해졌고, 일본은 1895년 조선의 왕비 시해라는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 겁에 질린 고종은 1896년 2월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독립국가의 위신을 지켜야한다는 독립협회의 주장과 규탄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그해 10월 12일 고종은 원구단(현재 조선호텔 자리)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꿨다. 다음날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외교관들이 입궐해서 황제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상복 입은 고종황제 ⓒ『우주를 품은 태극기』
10월 15일에는 일제에 의해서 희생당한 민비가 2년 만에 명성황후로 추존되고 국장(國葬)이 결정됐다. 1897년 11월 21일 밤, 발인을 마친 명성황후의 장례 행렬은 한양을 떠나 청량리 홍릉에까지 이어졌다. 그곳에서 내국인은 물론 많은 외국인들도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됐다. 당시 장례비용과 장례에 동원된 인력이 엄청났다고 하니, 발인 하루 전의 독립문 완공식은 예상보다 훨씬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은 이화문(李花紋: 오얏꽃 문양)을 황실의 문장(紋章)으로 삼고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복식·가구·도자기·금은 반상기·시계·건축물·어차(御車) 등 각종 황실 물품은 물론, 우표 등에도 널리 활용했다. 또한 1900년에는 훈장조례를 만들고, 태극 문양을 도안으로 활용한 서구식 훈장을 제작했으며, 1902년에는 애국가를 제정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대한제국이 주권재민의 민주적인 분권국가가 아니라,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당시 서구 국가들의 정치 노선과 반대되는 이런 정치행태는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애국가의 가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사
만수무강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기쁨과 즐거움이
날로 새롭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태극 문양이 다른 이화우표 ⓒ『우주를 품은 태극기』
이는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보다는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에 초점이 맞춰져 발행된 이화우표(1900년)와 독수리우표(1903년)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수리우표 ⓒ『우주를 품은 태극기』
사진에서 보듯이 이화우표 속의 태극 문양이 서로 다르며, 이화우표와 독수리우표의 태극 문양도 서로 다르다. 이는 태극기에 대한 대한제국 정부의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