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몰아낸 일제는
한반도의 식민지화 정책을 노골화했다. 이런 중책(?)을 자임하고 나선 자가 이토 히로부미다.
그는 1905년 11월 9일 특명전권대사라는 직함을 갖고 서울에 나타나서,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업무를 일제의 외무성이 지배·감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조했다.
서울에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가 초대 통감이 됐다.
주권침탈에 대한 범민족적인 저항과 구국운동, 헤이그 밀사 사건처럼
외교적인 노력도 있었으나, 근대화된 일제의 총칼과 선전선동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토의 쿠데타로 폐위당한 고종 황제 ⓒ『우주를 품은 태극기』
이토가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이완용 등 매국노들을 앞세워
1907년 7월 18일 고종황제를 폐위시키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다.
△이토의 쿠데타에 항의하는 군중 ⓒ『우주를 품은 태극기』
이튿날 아침부터 대한문 앞에서 매국노들을 규탄하고 양위를 반대하는 연설이 시작됐으며,
서울 전역이 시위장소로 변했다. 이날 시위의 절정은 오후 4시 대한제국 군대의 궐기였다.
장병들의 궐기는 일제의 경찰력으로 진압이 불가한 강력한 투쟁이었다.
그러자 이토는 고종황제에게 일본군의 출동을 요청하는 비극적인 칙령을 강요해 얻어냈다.
칙령에 따라 일제 보병 1개 대대가 기관포와 야포를 동원하여 시위 진압에 나섰고,
7월 20일 일제의 총검의 엄호 아래 황제양위식이 거행됐다.
7월 24일 이완용 등 매국노들은 새로 즉위한 순종황제로부터 7개조로 이뤄진 정미칠조약에 대한 윤허를 받아냈다.
△군대해산에 동원된 일제 군대 ⓒ『우주를 품은 태극기』
이 조약은 일제가 한국의 내정을 일일이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하는 것은 물론,
극비의 부대각서(附帶覺書)가 붙었다. 대한제국의 군대해산, 사법권과 경찰권을 일제에 위임하는 규정이 그것이다.
7월 31일 군대해산 칙령이 반포되고, 이튿날부터 군대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군대해산은 국가 존립의 보루가 무너졌다는 것이고,
이때부터 대한제국의 상징인 태극기도 더 이상 그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