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4월 7일 창간 되었을 때 독립신문의 명칭은 '독닙신문'이었고, 제호(題號)에 태극기가 없었다.
그러나 5월 2일부터 '독립신문'으로 표기가 바뀌고, 제호 한가운데에 태극기가 자리 잡았다.
이 격일제 신문의 발행부수는 당초 300부였는데 곧 3,000부로 늘었다.
△이사벨라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표지 ⓒ『우주를 품은 태극기』
영국 여성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shop)은 1898년 조선에 관한 베스트 셀러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발간했다.
태극문양을 표지로 장식한 이 책에는 당시 독립신문의 인기를 가능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독립신문은 권력의 남용을 파헤쳐서 이를 공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탐관오리들에게 상당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글 신문 뭉치를 팔에 기고 거리를 오가는 신문팔이 소년들과 가게에서
신문을 읽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1897년 조선의 진기한 풍경 중의 하나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제2권, 271쪽)
△독립문의 태극기(사진: 문화재청) ⓒ『우주를 품은 태극기』
그런데 독립신문의 제호에 보이는 태극기는 태극 모양과 괘의 배치가 어색하다.(150쪽 사진참조)
또한 그것은 1896년 11월 착공돼 만 1년 만에 준공된 독립문의 앞뒤에 새겨진
네 개의 태극기와 괘의 위치는 같지만, 태극 문양이 다르다.
왜 그럴까? 이는 조선인들이 태극기의 정형화는 고사하고,
서재필의 지적대로 국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조차도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조선 정부의 외부대신 이완용 등 후일의 매국노들이 비록 독립신문 발행과 독립문 건립은 지원했지만,
태극기와 애국가 보급 등을 통한 진정한 자유민주국가의 토양을 마련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종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호머 헐버트(Homer Hullbert, 1863~1949)는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1905)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서대문 밖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정부의 조치는
사려 깊은 사람들의 눈에 단지 피상적인 과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즉 모든 통제와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사적인 의사 표시 혹은 간절한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시류(時流)는 권력의 공정한 분배보다는 집중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때문에 새롭고 활력이 넘치는 국가라는 비전에 환호했던 사람들은 독립문의 한낱 신기루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헐버트의 『한국사』 제2권, 309~3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