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명국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민의례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다.
방법상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에서는 19세기 초 민간인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얹고,
군인·경찰관·소방관은 거수경례를 하는 방식으로 관례화됐다.
우리는 언제부터 어떤 형태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을까?
1896년 3월 15일 한성신보(漢城新報: 조선침탈의 일환으로 일본인이 창간한 국한문일본어 신문)에
"연설이 끝났을 때 방청인들에게 국기를 향하여 배헌(拜獻: 경례)하라고 하니
여러 관민이 일시에 박수하고 국기에 경례했다."는 독자투고가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제41권, 1999년, 189쪽)
이는 나라의 자주적 자세확립과 역사주체로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한
연사(演士)의 강연회(1896년 1월 19일)에 참석했던 청중이 감회를 피력하는 중에 나온 구절이다.
이때의 배헌이 요즘처럼 오른손을 가슴에 얹는 방식이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사료로는
조선 국민의 태극기에 대한 최초의 경례라고 할 수 있다.
△독립투사 서재필 ⓒ『우주를 품은 태극기』
당시 태극기에 최초로 경례를 하도록 지시한 연사와
태극기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독립신문을 창간한 인물은 같은 사람이며,
이름은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hn, 1864~1951)이다.
18세 때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한 그는 김옥균·서광범·홍영식·박영효 등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883년부터 일본 육군학교에서 1년간 현대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해서는 국방근대화의 일환으로 일종의 사관학교인 조련국(操練局)을 창설하는 데 기여했고 사관장이 됐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그는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반대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고, 신정부의 병조참판에 임명됐다.
그러나 쿠테타가 3일 만에 실패하자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국적과 의사자격증을 취득하고 미국 여성과 결혼한 그는 1895년 12월 25일 귀국했다.
30대의 서재필은 20대 청년시절 일본식 개화를 갈망했던 어제의 그가 아니었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경험한 그는 조선이 미국처럼 자유와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공개강연회를 통해서 국민 의식 교육과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독립신문 창간호 ⓒ『우주를 품은 태극기』
1896년 4월 7일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같은 해 7월 2일에는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개화세력을 규합했으며,
국민의 헌금으로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을 만드는 데 헌신했다.
△독립신문 제12호(1896년 5월 2일)에 처음 태극기 삽화 사용 ⓒ『우주를 품은 태극기』
이 과정에서 서재필은 태극기를 행사장에 게양하고, 건축물에 새기며,
독립신문 등 간행물에 게재하도록 했다. 또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