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조선통감 이토는 순종황제와 전국 순시를 기획했다.
1월초부터 대구 · 부산 · 마산 등을, 1월 하순 부터는 평양 · 신의주 · 개성 등을 시찰하는 것이었다.
황제와 우의를 과시하고 한반도 병탄을 앞두고
치안이 확보됐음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선전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통감정치를 선전하려는 그의 술책은 우리 민족의 태극기 시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시위를 촉발시킨 것은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였다.
시찰이 황제납치 음모라는 소문으로 부산에서는 4,000명의 결사대가 부두를 지키고,
60여척의 배에 나눠 탄 민중이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서북지역의 시찰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유약하고 리더십이 부족한 황제였지만,
민중의 엄동설한에 그가 일제의 선전에 이용당하는 모습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순종황제의 전국 시찰에 즈음하여 주목할 만한 사건은 최초의 태극기 시위였다.
통감부는 시찰을 앞두고 기념메달을 만들었다.
거리에는 대형 태극기와 일장기를 게양했으며,
군중들에게 두 나라 국기를 함께 들고 환영하도록 수기(手旗) 수만 개를 제작해서 나눠줬다.
△순종 황제 시찰 기념메달 앞면 ⓒ『우주를 품은 태극기』
△순종 황제 시찰 기념메달 뒷면 ⓒ『우주를 품은 태극기』
그러나 가는 곳마다 태극기만 게양됐고,
군중의 태극기만 흔들며 황제폐하 만세를 외쳤다.
일장기를 파는 상점들이 습격을 받아 파괴되고,
신의주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일장기를 찢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태극기는 국권회복과 나라사랑의 마스코트였고,
일장기는 통감정치에 대한 분노의 표적이었다.
△순종 황제의 행차 ⓒ『우주를 품은 태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