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를 만든 인물이다. 영의정 홍순목(대원군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의 아들이었던 그는 1883년 보빙사의 부대표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우편제도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귀국 즉시 그는 왕에게 건의해서 우정총국을 개설하고, 근대식 우편제도 시행을 위한 법규 제정 등에 착수했고, 우정총국 총판(최고책임자)이 되었다.
△천문학자 로웰 ⓒ『우주를 품은 태극기』
로웰(보빙사의 일행)은 보빙사의 부대표인 홍영식의 배려로 조선을 방문할 수 있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1883년 8월 일본에서 만나 미국을 거쳐 조선에 함께 왔다. 그리고 둘은 이듬해 3월 로웰이 떠날 때까지 7개월간 우정을 나눴다. 홍영식은 로웰의 조선 체류 중에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줬고, 떠날 때는 제물포에서 환송파티를 열어줄 정도였다.
△홍영식 ⓒwikimedia
홍영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를 만든 인물이다. 영의정 홍순목(대원군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의 아들이었던 그는 1883년 보빙사의 부대표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우편제도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1964년 발행된 홍영식 기념우표 ⓒ『우주를 품은 태극기』
귀국 즉시 그는 왕에게 건의해서 우정총국을 개설하고, 근대식 우편제도 시행을 위한 법규 제정 등에 착수했고, 우정총국 총판(최고책임자)이 되었다.
△1895년 발행된 태극우표 ⓒ『우주를 품은 태극기』
1884년 우정총국은 다섯 종류의 우리나라 우표를 태극기의 태극 문양으로 디자인해서 일본에 인쇄를 의뢰했는데, 일본 측이 중국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나오는 태극디자인으로 바꿔서 납품했다고 한다.
△다섯 종류의 문위우표 ⓒ『우주를 품은 태극기』
흔이 이 다섯 종의 우표를 문위우표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의 화페 단위인 '문(文)'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세계 각국은 국기를 우표 도안으로 종종 활용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유별나게도 문위우표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우표와 우편 엽서에 태극기 혹은 태극 문양을 사용해오고 있다. 참고로 문위우표 중 5문과 10문짜리 우표 두 종류는 1884년 11월 18일(양력) 우정총국이 문을 연 날에 발행되어 사용되었다.
△1904년 제물포에서 독일로 보낸 태극문양이 돋보이는 우편엽서 ⓒ『우주를 품은 태극기』
그런데 16일 후 12월 4일 저녁 우정총국 개국 축하만찬회장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바로 갑신정변이다. 홍영식은 이때 친군영(서양식 신식군대) 총사령관 겸 좌의정으로 승진했으나, 3일 만에 거사가 실패함으로써 처참하게 죽었고, 가족들도 자살하거나 처형됐다. 자연스럽게 우정총국은 폐지되고, 문위우표의 사용도 중지되었다.
△홍영식과 로웰 ⓒwikimedia, 『우주를 품은 태극기』
홍영식과 그 가족의 비극은 퍼시벌 로웰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미국 월간지 『월간 대서양』 (Atlantic Monthly) 1886년 11월 호에 기고한 '조선의 쿠데타'란 제목의 글에서 홍영식을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조선의 쿠데타 중 홍영식 애도 글 ⓒwekimedia
"일본인들의 배신으로 쿠데타가 실패하자, 주모자들은 살길을 찾아 일본과 미국으로 도피했으나, 홍영식은 혼자 남아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됐다. 용맹스럽고 충직했던 그는 대의(大義)를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로 여기고 기꺼이 생명을 바쳤다." (『월간대서양』 6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