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1883년(고종 20)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 파견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인 화답인 동시에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은 강제로 납치해가고, 독일인에게 조선의 외교와 재정권을 맡긴 청나라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주독립 외교의 하나였다. 또한 선진문물을 습득하기 위한 조선 정보의 정책적 고려이기도 했다.
△보빙사 ⓒwikimedia
보빙사(1883년(고종 20)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 파견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인 화답인 동시에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은 강제로 납치해가고, 독일인에게 조선의 외교와 재정권을 맡긴 청나라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주독립 외교의 하나였다. 또한 선진문물을 습득하기 위한 조선 정보의 정책적 고려이기도 했다.
보빙사 일행 11명은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으며, 시카고를 경유해서 9월 13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서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모두 뉴욕에 출장 중이어서 일행은 포크(George Foulk:후에 주조선해군무관, 대리공사로 활약) 해군 소위 등의 안내를 받아 뉴욕으로 갔다. 9월 18일에는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사절단이 큰 절을 올린 것이 화제가 됐다.
△보스턴 방돔 호텔에 휘날리는 태극기(kbs 방영사진) ⓒ『우주를 품은 태극기』
일행은 9월 19일부터 보스턴에서 산업박람회, 시범농장, 직물공장 등을 두루 시찰했는데, 이들이 머물던 보스턴의 방돔(Vendome)호텔 현관에는 9월 19일부터 24일까지 6일 동안 태극기가 게양됐다.
△보스턴 방돔 호텔에 휘날리는 태극기(kbs 방영사진) ⓒ『우주를 품은 태극기』
9월 24일 보빙사 일행이 뉴욕 브루클린 해군조선소를 방문하자, 해군 군악대의 연주에 이어 12년 전 강화도에 포격을 가했던 군함 콜로라도호에서 예포가 발사되고 태극기가 앞 돛대의 망루 위로 올라갔다. 일행은 태극기가 휘날리는 군함 카탈파호를 타고 설탕공장 등 인근 지역도 시찰했다. (뉴욕 일간지 The Sun 1993, 9월 25일 보도)
△태극기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9월 26일 일행이 카탈파호를 타고 미 육군요새지인 거버너스 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때, 부두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일행은 체스터 아서호(미국 대통령의 요트)로 갈아탔는데, 돛대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미국 아서 대통령에게 큰 절하는 보빙사 일행 ⓒ『우주를 품은 태극기』
미국 뉴욕타임스는 태극이 한국인의 행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소개했으며, 뉴욕헤럴드는 미 해병의 실수로 게양된 태극기의 좌우가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보병사 일행은 9월 29일부터 워싱턴에서 정부기구를 견학하고, 외교·군사 고문 초빙을 교섭했다. 10월 13일에는 대통령에게 고별인사를 한 후, 두 그룹으로 나뉘어 귀국했다. 부대표 홍영식은 로웰의 안내로 1883년 12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했고, 대표 민영익은 포크 소위의 안내로 유럽을 경유해서 1884년 5월 31일 도착했다. 유길준은 유학을 위해 미국에 남았다.
△태극기와 성조기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보빙사는 이와 같이 자주독립국가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하여 태극기를 크기 별로 준비해 가서 미국의 도처에서 휘날렸는데, 이는 태극기가 조선의 상징으로 해외에서 최초로 활용됐다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