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청소년 말 문화개선 공모전 수상작 (장려상)
환영합니다
박여원 (경해여자고등학교)
“환영합니다.”
민희의 말에 억지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정말 들어가기 싫었다. ‘환영합니다’ 라는 말풍선과 함께 웃고 있는 예쁜 누나 그림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언어폭력을 일삼는 문제아임을 증명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민희와 이미 약속을 해버렸고, 민희와 사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똑똑똑”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두드린 문임에도 대답이 없자 나는 조금 무안했다. 다시 한번 두드렸지만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문을 당겨보니 글쎄,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뭐랄까 드라마에 나오는 문제있는 환자들의 상담실같은 희고 딱딱한 분위기가 아닌,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사무실이었다. 그리고 별로 크지도 않은 사무실임에도 방으로 이어질법한 문이 3개나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각각의 문구들이 적혀있었다. 가장 왼쪽의 문에는 '뭘 봐'라고 적혀있고, 가운데의 문에는 '반가워'라고 적혀있고 가장 오른쪽의 문에는 '꺼져'라고 적혀있었다. 이 요상한 문들을 떠올려 보라. 가운데 문과 다르게 양쪽의 문에 적혀있는 말들은 내가 자주 쓰는 말임에도 왠지 들어가기가 싫었다. 나는 3초도 채 고민하지 않고 '반가워'라고 적힌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는 듯 인기척하나 없이 조용하던 사무실이었는데, 문을 두드리자 한 할아버지(아니지, 박사님이시겠지.)께서 문을 열어주셨다.
“내가 있는 곳을 찾아냈구나! 어서오너라. 반갑다. 네가 창운이지? 여기 앉거라.”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해서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박사님의 따뜻한 표정과 말씀에 조금 풀리는 듯 했다.
“민희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 민희와 잘지내주어서 고맙구나.”
“아니에요. 민희랑 친구인것만으로도 저는 기쁜걸요.”
나도 모르게 즉각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말하자마자 얼굴이 빨개져버렸지만 말이다.
“호오, 녀석. 하하하. 민희가 너의 고민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단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나는 다시 긴장이 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렇게 경직 될 필요 없다. 편하게 대화한다고 생각해. 그럼 내 이야기부터 해줄까?”
“네!”
막막하다고 느끼는 찰나였는데 살았다싶어서 얼른 대답했다.
“허허 녀석.”
박사님은 마치 턱수염이 해야 할 말을 기억이 나도록 하는 마법수염이라도 되는 듯이 연거푸 쓰다듬으시더니, 말씀을 시작하셨다.
“내가 8살일 때 말이야, 내 밑으로는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고 아버지는 6.25 전쟁때 두 다리를 잃으셔서 집에서 꼼짝도 못하셨고 어머니는 남의 잡일을 도맡아하시고 우리 식구를 한입이라도 더 먹여살리시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셨단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내 동생들을 잘보는 것이 나의 큰 임무라고 생각했어.”
또 다시 생각에 잠기신 듯 수염을 쓰다듬던 박사님이 말씀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셋째가 골목대장이라는 놈에게 얻어맞고 왔지 뭐냐. 아버지가 반불구라고 놀리면서 말이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 어떻게든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그 놈의 집을 찾아갔지. 그런데 어라? 이 놈이 나를 보자마자 욕지거리를 하더구나.”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어리둥절했던 나는 어느 새 두 눈을 반짝이며 박사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날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어. 그 놈의 기에 눌려버린거지. 그 뒤로 나는 어떻게 하면 고 놈을 재치고 골목대장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밤낮으로 생각하고 혼자서 체력을 기른답시고 온 동네를 뜀박질하며 돌아다녔지. 그리고 그렇게 결전의 날이 왔단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니?”
“음.. 박사님께서 운동을 열심히 하셨으니까 이기셨을 것 같은데요.”
멍하게 이야기에 집중하던 갑작스런 박사님의 질문에 깜짝 놀라 대답했다.
“맞아. 이겼지. 그런데 그 녀석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단다. 나는 많은 아이들 앞에서 처음 그 녀석을 봤을 때 그 녀석이 내게 했던 말에 조금 더 나쁜 말을 보태어 그대로 해주었어. 그리고는 손짓으로 괜히 폼을 잡았는데, 웬걸. 그 녀석이 무서웠는지 몇 일 동안 골목에 놀러 나오지를 않더구나.”
“오오.. 그럼 골목대장은..”
“맞아. 내가 하게 되었지. 나는 동네아이들의 군기를 잡는답시고 매일 입에 담지도 못할 험한 말로 아이들에게 겁을 주곤 했어. 덕분에 우리 동생은 절대 맞을 일도 없었고.. 하지만 이렇게 험한 말을 하다보니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단다. 조금만 기분이 나빠져도 험한 말이 툭툭 튀어나오고, 내 말로 많은 동네 아이들을 울렸지. 그래도 나는 일단 우리 동생들을 지켜냈다는 뿌듯함에 별 죄책감 없이 골목대장 노릇을 해나갔어.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부르시더구나. 동네 아이들을 상처주고 울리고 다니느냐고 말이야. 정말 호되게 혼났어.”
박사님께서는 다시 수염을 몇 번 쓰다듬으셨다.
“그리고 그 날 밤 생각했어, 내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말이야. 셋째가 받았던 상처들을 동네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주어 왔던 것이야. 난 죄책감에 그 날 밤을 눈물로 지새웠단다. 그리고는 생각했지,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고 또 다른 나 같은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말이야.”
“...”
점잖게만 보이던 박사님께도 남들에게 강하게 보이기 위해 욕지거리를 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내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고백하건데, 나는 입이 정말 험하다. “욕쟁이 이창운”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내가 이렇게 된 건 내가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였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과 다르게 키가 조그맣던 나는 늘 아이들에게 놀림의 대상이었다. 5학년이 되고부터 나는 강해져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키도 조그맣고 내세울 것이 없던 나는 현란한 욕 실력으로 아이들이 나를 쉽게 보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1이 된 지금처럼 이제는 키가 크고 듬직한 내가 되었음에도, 옛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자꾸 욕을 쓰게 된다. 또 남자라는 인격체의 습성이 그러하듯, 조금이라도 남보다 더 강해보이고 싶은 마음에 여리고 고운 말보다는 거칠고 사나운 말들을 툭툭 써왔다. 고운 말을 쓰면 왠지 계집애들을 보듯 남자애들이 무시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말하고 나니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실수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럽구나. 아니 어린 시절의 잘못에 더 가깝겠어. 그때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면 괜스레 내 입에게 미안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큰 상처를 남겼음에 죄책감을 느낀단다.”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나 역시 내가 했던 말들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내 거침없는 욕섞인 말들에 울음을 터뜨렸던 민창이, 주형이, 진호... 많은 아이들의 울상지은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또 싸울 때 욕을 주고받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윤민이와 싸웠던 일도 생각이 났다.
“박사님 말씀을 들으니까 저도 예전 친구들의 모습들이 떠올라요.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뱉어버린 말은 쏟아진 물주전자같아서 주워 담을 수는 없어. 하지만 앞으로라도 그러지 말고 따뜻한 말을 하도록 노력해보렴. 그러면 분명 넌 주위의 친구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할 수 있을거야.”
박사님께서 웃으시면서 말씀을 하셨다. 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부터의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곳에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고운 말만 쓰도록 노력할게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어서 고맙구나. 다음에도 고민되는 일이 있다면 찾아와도 좋단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즐겁게 인사드리고 문을 나서려는 찰나, 박사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창운아. 너가 이 사무실에 들어올 때 이 방을 찾았던 것처럼 누구나 따뜻한 말을 더 좋아하게 되어있단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들에게 가시 박힌 말을 하곤 하지만 그건 사실 상대방도 그들 자신도 좋지않은 방향이란다. 진정하게 윈윈하는 방법에 대해, 너는 오늘 조금이라도 알았으리라 믿는다. 앞으로 잘할 수 있지?”
“네!”
힘차게 대답하고 기분좋게 사무실을 나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민희가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민희야! 웬일이야?”
“웬일이긴~ 너가 상담 잘 받았는지 확인하러 왔어. 어때? 이젠 예쁜 말만 쓸거지?”
“당연하지! 하하”
“음.. 창운아.”
민희가 쭈뼛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혹시 사귀는 것을 취소하자는 말이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긴장하여 대답했다.
“음.. 으응? 왜?”
“사실 나도 중학교때 욕을 많이 사용했어.”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 민희가 욕을 할 줄 알았다니!
“욕을 쓰지 않으면 내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고 욕을 쓰면 내가 조금이라도 강해지는 느낌이었어. 하지만 나도 우리 할아버지, 그러니까 박사님이랑 이야기하면서 내가 잘못 생각해왔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우리 이제 다른 친구들도 우리처럼 고운 말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해주자! 그 전에 우리도 당연히 고운 말만 쓰고.”
민희가 베시시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건물을 나와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면서, 해맑게 웃는 초등학생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친구들도 언젠가는 욕을 배우겠지.. 하고 생각하니 왜인지 모르게 끔찍했다. 저렇게 해맑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을 우리, 아니 가지고 있는 우리.. 말도 곱고 아름답게 하면 매사에 상대방이나 자신이나 찌푸릴 일이 없을 것이다. 나와 민희는 앞으로 우리 반에서 우리 학년으로, 우리 학년에서 우리 학교로, 우리 학교에서 우리 지역으로 범위를 넓혀 나가며 고운 말 쓰기 운동을 할 생각이다. 이 생각에 여러분도 동감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