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눈으로 세상보기
- 소식지 행복한 通 7호 기고. 채희문 위원 -
호적초본이나 등본을 떼어보면 우리 이름자 위에 본관(本貫)이 번듯하게 적혀있음을 알게 된다. 본관이란 한 집안의 시조가 난 땅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조상님들의 고향을 머리에 인 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출생신고서 작성부터 시집가고 장가드는 경사에는 물론, 죽은 뒤에 비석을 새길 때까지 본관을 내세우는 걸 보면, 우리 한국인들에게 ‘집안의 고향’은 곧 명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하긴 조선조 때의 선비들은 지방출장을 가거나 유람을 다니던 중에 자기 본관을 지나치게 되면 말에서 내려 읍을 한 뒤 걸어갔다고도 하니 이쯤 되면 본관이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대대로 그런 관습을 이어 살아온 탓에 우리들 대부분은 성씨의 고향인 본관만큼이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도 우러르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한 나라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 두 군데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동서 어느 지역, 남북 어느 장소건 하등 다를 바 없는 대한민국 땅이건만,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나 살고 있는 지역을 타 지역보다 한 단 높게 자리매김하는 것을 관례로 삼곤 한다. 내가 사는 지역의 자존은 높이고 남이 사는 지역은 심지어 경멸까지 하는 전통이 물안개처럼 밑바닥으로 깔려드는 현실!
둘 이상의 지역.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 지역과 남이 사는 지역 간에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상충되면 매사가 배배 꼬이게 된다. 사사건건 실타래처럼 꼬이는 건 당연한 이치다. 내가 사는 지역은 위로 모시고 남이 사는 타 지역은 아래로 내리누르는 것이 관례이며 온당한 관계로 여겨지다 보니 점점 지역 간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실질적인 이해관계로 충돌하게 된다. 내 눈으로 보면 모두 남이지만, 남의 눈으로 보면 나도 남이 되는 까닭에 주민관계는 점점 적대적인 사회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역갈등이고 집단 간의 가치갈등이다.
우리사회의 갈등유형은 계층, 노사, 이념, 지역, 세대, 남녀, 다문화, 환경갈등 등 총 8가지로 인식된다. 2014년에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여론조사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국민통합에 관한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위 8가지 갈등유형 가운데 ‘지역갈등’에 대해서 무려 58.6%가 ‘심하다’고 응답했다. 19세 이상 성인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인데 2010년 이후 5년간 지속적으로 절반 이상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갈등유형으로, 8가지 유형 가운데에서도 ‘심함’ 비율로 상위권에 해당하고 있다.
특히 광주, 전라지역 주민들과 서울지역 주민들이 느끼는 갈등 심각성은 ‘심함’ 비율이 각각 68.9%와 68.7% 수준으로 높았으며 연령별로는 30대와 50대, 그리고 학력이 높을수록 ‘심함’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50대라 하면 1960년대 전후에 태어난 국민들로, 우리사회의 발전과정을 직접 겪은 세대이지만 지역갈등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도 균형을 이루지 못한 지역발전 차이로 인한 갈등 이슈가 많았던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갈등은 심각성 순위가 높은 만큼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지역갈등을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광주, 전라지역에서는 또한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태어나 살아온 것에 대한 만족도’에서도 ‘불만족 비율’이 13.2%로 가장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 옛날처럼 산줄기, 강줄기로 천부적인 경계가 지어져 고립되어 사는 것도 아니고,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 뚜렷하게 이질감을 느끼지도 않을 터이니, 국가적 자원배분이 집중되거나 소외된다는 실재감, 그리고 정부 성향에 따른 차별 등등으로 생겨난 비교형 지역갈등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갈등이란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 이해관계 따위로 적대시 또는 불화하는 일을 뜻한다. 그러나 고려 말, 스러져가던 왕조의 마지막 기운이 느껴지던 무렵, 후에 조선조 3대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고려 충신 정몽주에게 이렇게 제안하지 않았던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如此亦如何 如彼亦如何)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100년까지 누리리라 (吾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이방원은 칡뿌리가 얽혀있는 모습을 서로 힘 겨루어 밀어내는 형상으로 보질 않고, 서로 힘을 합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해석했다. 얽히고설킨 것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면 튼실한 한 줄기와 다름없다는 뜻일 게다. 우리 사회는 다원화, 민주화, 정보화로 치달으면서 권리의식이 증가되고 사회적 인식이 늘어가고 있다. 물론 사회참여도 늘어나고 있지만 그럴수록 도처에서 갈등 또한 늘어가고 있다. 수많은 갈등, 또 갈등… 그러나 독수리가 하늘 위에서 굽어보듯 큰 그림으로 내려다본다면 갈등이란 서로 끌어당기며 힘을 합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갈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나름대로 긍정적인 에너지도 품고 있다는 말이다. 지역갈등도 물론 그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역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해답은? 독수리처럼 높이 날아서 굽어보자는 것, 본관이 어디든, 고향이 어디든 상관하지 말자는 것.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으로 합해보자는 것. 지역 간 산업불균형을 해소하고, 지역마다 문화교류 사업을 확대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 하다보면 지역 간 협의, 조정기능이 강화되고 지역혁신체제가 구축되어 지혜로운 방식으로 갈등이 해소될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자는 것. 지역의 문제점이 드러나 갈등으로 얽히더라도 이방원이 드렁칡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통합하고 발전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독수리의 눈으로 지혜롭게 세상을 바라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