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바로알기
광복 70주년 대한독립의 별 - 김마리아
△김마리아 선생 ⓒ네이버 지식백과
김마리아(金瑪利亞)선생을 아시나요? 선생은 2007년 여성단체가 10만원권 지폐의 여성인물 후보자로 제시한 6명 중 한 분이었습니다. 선생을 소재로 한 작품도 여러 편 있습니다. 올해 방영한 KBS다큐멘터리 3.1절 특집 ‘김마리아, 대한의 독립과결혼하다’를 비롯하여 단편애니메이션 ‘대한독립의 별, 김마리아’ 그리고 도서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등 선생을 조명한 작품의 수가 꽤나 많습니다.
다양한 작품 속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만큼 선생이 어떠한 인생을 살았는지 궁금하시죠? 선생을 추모한 시 한편 먼저 보시고 그녀를 알아보겠습니다.
'서간도에 들꽃 피다'
- 이윤옥
황해도 연안 서남쪽 포구
몽금포 해변의 반짝이는 은모래빛 벗하며
소래학교에서 꿈을 키우던 가녀린 소녀
서른넷에 돌아가신 아버님 뜻 잇고
세 자매 교육에 정성들인 어머님 의지 받들어
학문의 높은 문을 스스로 열어젖힌 억척 처녀
흰 저고리 고름 날리며
일본 칸다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칼 찬 순사 두려워 않고
2·8 독립의 횃불을 높이든 임이시여!
그 불씨 가슴에 고이 품고
현해탄 건너 경성 하늘 아래
모닥불 지피듯 독립의지 불붙이며
잠자는 조선여자 흔들어 깨워
스스로 불태우는 장작이 되게 하신 이여!
배워야 나라를 구한다며
자유의 여신상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뼛속 깊이 갈망하던 독립의 밑거름되어
상하이 마당로 독립군 가슴에
수천 송이 무궁화로 피어나신 이여!
세상을 구원한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처럼
닭 우는소리 멈춘 동방의 조선 땅에
인자한 마리아로 나투시어
미혹의 나라를 밝히고
온 세상에 조선을 심은
한그루 떨기나무 그 이름 김마리아
그대
무궁화동산에서 영원히 지지 않으리.
대한독립과 결혼한 그녀
김마리아 선생은 황해도 장연의 지주인 아버지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의 3녀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는 선생의 세례명이자 이름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주셨습니다. 선생의 아버지 김윤방은 기독교신자일 뿐 아니라 만석꾼으로 매우 부유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와 교회를 세운 선각자였는데, 안타깝게도 김마리아가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선생은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를 졸업 했습니다. 그즈음, 어머니 또한 여의고 숙부들의 슬하에서 자라게 됩니다.
선생의 친척들 역시 대단한 독립운동가들입니다.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고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필순은 선생의 셋째 삼촌, 김규식의 부인이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순애는 선생의 셋째 고모였습니다. 선생은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애국지사인 어른들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어 갔습니다.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선생은 집에서 한학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선생은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면서 연동여학교(현재 정신여자중학교)에 다녔으며 1910년 6월에 졸업했습니다. 2년 동안 전남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를 지냈고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뒤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선생의 독립운동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여자유학생들과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조직이 바로 그것입니다. 1918년 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하여 황에스더 등과 구국동지가 되었으며, 1919년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납니다. 풀려난 직후, 일본에서도 한복만 입던 선생은 일본순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 기모노를 입었습니다.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복사하여 기모노 허리춤에 숨긴 채 동료들과 2월 15일 부산으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에서 우연히 독립운동중이던 고모부 서병호와 셋째 고모 김순애를 만나 독립운동 활동계획을 함께 논의하였습니다. 이 후 선생은 독립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서둘러야 한다며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착수합니다. 보성사의 사장으로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책임을 맡았던 이종일은 그의 비망록에 김마리아 선생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김마리아가 천도교 본부 및 보성사를 찾아 와 동경 한국인 남녀 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술회하고,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할 것을 힘써 권유하였다. 나는 김마리아에게 우리들도 이미 계획 중이며, 또 지난 갑인년(1914) 이래 민중이 함께 일어나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암암리에 모색하여 왔다고 하니, 김마리아는 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을 격려하며 기뻐하였다.”
김마리아 선생은 황해도 봉산에서 활약을 마치고 서울 모교를 찾아갔다가 일경에게 체포당하였습니다. 이때 모진 고문으로 상악골축농증이라는 병에 걸려 평생 고생하게 됩니다.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고문 후유증이 심해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감시를 피해 탈출 한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합니다. 중국에서도 난징의 금릉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 하는 동시에 상해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힘썼습니다.
△애국 부인회 간부 ⓒ국가보훈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인장 ⓒ연동교회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는 파가 갈려 내부 혼란을 겪었고 이에 실망한 김마리아 선생은 1923년 6월 21일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하이를 떠납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한 김마리아 선생은 도산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의 도움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은 후 파크대학ㆍ시카고대학원ㆍ뉴욕신학교 등에서 수학하면서 정진했으며 한편으로는 1928년 근화회를 결성하여 꾸준히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 ⓒ주간기독교
대한독립의 별이 되다.
1933년 귀국하지만, 일제의 감시로 서울에서는 활동하지 못하고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 부임하여 신학을 강의합니다. 강의를 하면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지만, 고문 후유증이 재발하여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선생은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3월 13일 별세하였습니다.
임종 직전에 “화장해서 대동강 물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하였고, 선생의 수양딸인 배학복은 그 숭고한 뜻을 따랐습니다.
△김마리아 동상_보라매 공원 ⓒWikipedia(JeongAhn)
△김마리아 선생 어록비 ⓒ독립기념관
정부에서는 김마리아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국민대통합위원회는 지독한 고문후유증을 이겨내면서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한 김마리아 선생을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