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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수원의 논개 - 김향화
여러분은 기생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아마도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드라마나 방송을 통해 생긴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생출신 독립운동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기생출신 독립운동가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본디 조선의 기생은 천민이라도 공인 예술가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1910년 경술국치이후 일본이 전통적인 기생의 존재를 부정하고 '기생 및 창기 단속령'을 내려 공창제를 강화하여 천한 기생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당시 수원 최고의 기생, 지금은 수원의 논개로 불리운 김향화 선생에 대해 소개해볼까 합니다.
순이에서 김향화로...
△기생 김향화의 초상화 ⓒ수원박물관
김향화 선생은 1896년 7월 16일 서울에서 출생했습니다.어릴 적 이름은 순이였으나 가정형편으로 인해 15살에 기적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때부터 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향기 향(香)에 꽃 화(花). 김향화로 제 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스무살 무렵 부터는 수원 군내의 최고의 기생으로 자리 잡아 유학생들, 지식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조선 독립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온갖 계책으로 봄을 머무르게 하되 봄은 사람을 머무르게 하지 못하고
만금은 꽃을 애석해 하지만 꽃은 사람을 애석해 하지 않아,
나의 푸른 쪽진 머리, 주홍 소매를 쥐고서 한번 넘어지면 이십 광음이 끝나도다.
누가 가곡이 근심을 능히 풀 수 있다 말하는가.
가곡은 일생의 업원(전생에서 지은 죄로 이승에서 받는 괴로움)이로다.
본디 경성 성장으로, 화류 간의 꽃이 되어, 삼오 청춘 지냈구나,
가자가자 구경 가자, 수원산천 구경 가자,
수원이라 하는 곳도, 풍류기관 설립하여, 개성조합 이름 쫒네, 일로부터 김행화도,
그 곳 꽃이 되었세라,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
- 조선미인보감에 실린 김향화 선생에 대한 묘사
△기생조합 홍보자료 조선미인보감에 실린 김향화 ⓒ수원박물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김향화 선생과 기생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기방은 대문에 휴업 간판을 내걸었고, 김향화 선생과 20명의 동기들은 화려한 비단옷, 비녀 대신 소복과 나무비녀를 꽂고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대한문에 도착하여 망국의 설움을 토로하며 통곡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매일신보에 대서특필되었고, 수원지역 기생들의 애국심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립을 외치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운동이 전개되고 이는 전국적으로 파급되었습니다.1919년 3월 19일, 진주의 기생 6명이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되면 한이 없다’고 외치며 일본군에 잡혀갔다는 기사가 한 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기사를 본 김향화 선생은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나이는 본인보다 더 어리지만 기생 선배였던 서도홍을 찾아 만세시위를 결의했습니다. 당시 수원에서 활동하던 33인의 기생을 모아 성병검사를 받으러 가던 3월 29일, 그 날을 거사 날로 지정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치마폭에 감추었습니다.
화성행궁의 봉수당에 세워진 자혜병원으로 향해가던 중 수원 경찰서 앞에서 김향화 선생이 태극기를 꺼내 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여러 기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따라 불렀습니다. 일본 경찰들이 총칼을 들고 달려나와 위협했지만 기생들은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경찰들을 막아서며 만세행렬에 동참하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모두 검거 되었고, 김향화 선생은 주모자로 지목되어 구금되었습니다.
“수원기생 김향화는 태극기를 들고 여러 기생을 데리고 경찰서 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일제)경찰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졌다. 북촌검사의 심리를 받고 지난달 이십칠일 공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팔 개월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김향화에게 징역 6개월 형을 언도하였는데 방청석에 사람이 가득하였더라.”
3·1 독립운동이 있었던 1919년 6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김향화 선생의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지만, 당시 상황으로 보아 고문후유증으로 사망 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기생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김향화 선생은 수원시에서 직접 국가에 공훈심사를 올려 2009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명실상부한 독립운동가로 기록에 남게 되었습니다.
△수원박물관에 전시된 김향화의 표창장과 훈장 ⓒ수원박물관
2014년 현재 김향화의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독립유공자 표창장과 훈장메달은 수원박물관 근대인물 코너에 전시되어 민족정신을 알리고 있습니다.
시인 고은이 지은 시로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기생독립단
평양 기생 아미녀가 이름과 몸 떨쳤지요
사나이들 뼈깨나 녹았지요
평양하고 비슷한 데가 진주성이지요
대동강하고 남강이 사촌이지요
수원기생조합 기생 50명이
기미년 3월 29일
자헤병원으로 정기검진 받으러 가던 중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 외쳤지요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병원으로 가서도
검진 거부하고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외쳤지요
만세 부른 기생들 다 붙잡혀가서
김향화는 6개월 징역 받아 콩밥 먹었지요
기생들 꽃값 받아 영치금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만세 주동자 김향화
아름다운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조선사람 불효자식에게는 술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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