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바로알기
광복 70주년 벽안의 독립투사 - 석호필
몇 해 전, ‘프리즌 브레이크’ 라는 미국드라마가 한국에서 엄청 인기 있었습니다.굉장히 매력적이었던 주인공 이름이 스코필드였고 석호필이라는 애칭으로 굉장히 널리 알려졌는데 기억들 나시나요?
사실 오늘 소개 할 독립투사 이름과 한국명이 드라마 주인공하고 같아요.
한국인보다 대한민국을 더 사랑했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갖으려해요.
프리즌브레이크의 미남 석호필을 뛰어넘는 원조 석호필의 매력에 함께 빠져 봅시다. 우선 소개에 앞서 그에 관한 짧은 일화부터 알려드릴게요.
노신사와 외국인선교사
1919년 경성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부자로 보이는 노신사가 마주 앉은 외국인 선교사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물었다. 외국인 선교사의 대답은 " 당신이 교회에 나올 수는 있겠지만 2천만 조선 동포에게 사죄하기 전에는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 대답했다. 당황한 노신사를 뒤로 한 채 선교사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부자로 보이는 노인은 을사오적 매국노 이완용이었고 외국인 선교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였다.
△ 일본의 만행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려 대한민국 독립에 힘을 쏟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스코필드 선생의 사진 ⓒ국민대통합위원회
스코필드 선교사는 1889년 3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하고,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체셔주의 한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고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런데 1910년에 소아마비를 앓게 되면서 신체장애가 생겨 지팡이 없이는 거동할 수 없게 되었으나, 이듬해에 토론토 대학교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의 한국과의 인연은 1916년 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올리버 알 에비슨으로부터 한국으로 와 달라는 한통의 편지를 받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그해 가을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衛生學)을 강의하게 되면서 한국인들과 친해졌습니다.
그저 교수였던 그에게, 인생을 바꿀 인연이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직장동료 이갑성 선생 이었습니다. 이갑성 선생의 부탁으로 스코필드 박사는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카메라 1대를 들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현장을 조사해 사진을 찍고 기록해 '수원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해외 언론에 최초로 공개 했습니다.
석호필 박사의 기록과 사진은 같은 해 9월 중국 상하이의 유력 영자지 '차이나 프레스'에 연일 보도되며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9년 초, 미국에서 온 친구로부터, 이승만, 안창호 등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갑성 선생에게 이 소식을 전하며 한국에서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언질을 주어 3·1운동을 지피는데 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알았던 유일한 외국인이었고 독립만세의 역사적인 순간을 찍은 사진과 호소문을 외국 언론에 투서했으며 이는 세계 언론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또한 스코필드는 1919년 2월 5일 3·1운동 거사 준비로 이갑성씨와 몰래 만나,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파악을 맡았답니다.
△ 3.1운동 당시 사진 ⓒ국민대통합위원회
3.1운동 회고록에서 스코필드 박사는 자유를 요구하며 일어선 군중을 본 그때의 정경은 참으로 잊을 수 없고 눈부신 광경 이었다고 회고 합니다. 3.1운동 당시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필름은 독립운동가가 구두 밑창에 숨겨서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그 후 3.1운동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이 일본군들에게 무참하게 보복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박사는 직접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급히 수원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참혹한 상항을 상세히 사진과 함께 기록하면서 이 학살사건의 명령권자가 누구인지까지 정확히 밝혀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3.1운동 뒤에 발생한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 입니다.
이 학살행위가 세상에 알려 지면서 일본은 곤혹을 치르게 되지만 석호필 박사는 그 뒤로도 멈추지 않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참혹한 조선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습니다.
아래 글은 34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 박사가 일본 발행 영자지 <재팬 애드버타이저>
1919년 11월 29일자에 기고한 글의 일부입니다.
『 19세 가량의 C씨는 끈으로 손목이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렸다. 경찰은 4일 동안 때때로 코에 맹물을 들이부었다.
다음 3일간은 맹물 대신 비눗물을 사용했다. 마지막엔 후춧가루를 푼 물이 동원됐다.C씨가 탈진한 상태에서도
입을 열지 않자 경찰은 그의 발톱을 뽑으라고 명령했다. 한국인이 핀셋을 들었지만 머뭇거리다가, 대신 발가락 옆의 살점 일부를 떼어냈다. 피가 철철 흘렀고, 그게 피에 굶주린 경찰의 구미를 만족시킨 듯했다.....』
스코필드 글에 등장하는 C씨는 강우규 의사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아 일본 경찰에 붙잡힌 조선인이라고 합니다.
석호필 이란 이름은 스코필드 박사가 직접 지은 한국 이름으로 스코필드와 비슷한 발음이면서 동시에 호랑이처럼 굳센 마음으로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하겠다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5월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3.1운동 관련 수감자들 노순경, 유관순(柳寬順), 어윤희(魚允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여자 감방 8호실)를 직접 방문하기도 합니다.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을 즉각 중지하라고 호소했습니다. 석호필 박사가 이렇게 한국사람보다 더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외국인 신분 이었고 더군다나 영일동맹관계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에서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도 제지를 당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를 향한 거듭되는 일본의 암살시도였습니다. 그 해 4월, 강도를 가장한 스코필드 암살미수 사건이 그의 숙소에서 일어났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스코필드는 강제 출국 당합니다. 강제출국 당하면서도 그는 총독에게 탄원하여 감옥에 있던 독립운동가 이상재, 이갑성, 오세창등을 면회하고 격려하고 캐나다로 건너가 대학교수로 활동하며 캐나다에서도 여전히 한국인들을 돕습니다.
△석호필선생과 제자들 사진 ⓒ국민대통합위원회
조선이 독립하자 그는 꿈에 그리던 한국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해방 후 1959년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석호필 박사는 보육원등을 후원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쓰는 한편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도 강력하게 비판하며 맞섰습니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스코필드의 묘 사진 ⓒ국민대통합위원회
그렇게 평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한 석호필 박사는 1970년 4월 12일 81세를 일기로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별세합니다.조선의 독립 운동에 헌신한 공적을 인정받아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우게 됩니다.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투쟁했던 프랭크 스코필드- 석호필 박사.
그는 우리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애국지사요, 34인의 민족 대표 입니다.